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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진 Jun 30. 2024

엽편소설


태9 態

1. 명사 아름답고 보기 좋은 모양새.

2. 명사 겉에 나타나는 모양새.

3. 명사 일부러 꾸며 드러내려는 태도.

(네이버 어학사전)




  지하철 플랫폼을 걸으며 태희는 흘긋, 스크린도어에 비친 저를 보았다.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보통 체형임에도 아랫배가 톡 튀어나온 옆태. 태희는 힘을 주어 아랫배를 당겨 넣었다. 오리처럼 엉덩이와 아랫배를 내밀고 걷는 폼 때문에 어린 시절 놀림을 받곤 했다. 자세를 고치려 해 봐도 엄마 배 속을 나온 이래 한평생의 버릇이라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쇼윈도 따위에 비친 제 옆모습을 마주할 때면, 태희는 누군가 배에 실을 꿰어 당기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빠른 걸음으로 인파를 헤치며, 태희는 자꾸만 튀어나오는 아랫배를 당겨 넣는 데 온 신경을 쏟았다. 이제 막 이별한 참이었음에도.


  조규행은 네 발로 걸었다. 멀쩡히 두 발로 걷던 그가 태희를 사랑한 이래 네 발 동물이 되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우러러보고, 두 손 두 발 다 꿇고, 태희만을 숭배하던 스핑크스. 누군가 조규행과 헤어진 이유를 묻는다면 태희가 할 말은 그뿐일 거다. '조규행은 네 발로 걷는다.' 그럼 태희의 절친한 친구들은 '그래, 그것 참 부담이었겠네.' 하며 태희를 격려해 줄 테다. 설령 헤어진 이유가 '조규행은 네 발로 걷지 않는다.'더라도 '감히 네 발로 걷지 않다니! 여자친구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군.' 하며 헐뜯어 줄 것이 분명했다. ―진짜 이유를 내놓지 않았으니 어떤 말로든 위로 될 리가. 조규행과의 이별은 단지, 이 즈음 일어날 필연적 사건이었을 뿐이다. 태희만이 아는 운명 같은 것.

  그럼에도 태희는 메신저로 친구들과 다음 주 중 어느 카페엔가 모일 것을 도모하고, 약속 당일엔 과장을 섞은 회포를 풀어댈 테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조각 케이크의 비싼 값 이외의 어떤 것도 와닿지 않는 자리임에도 태희와 친구들은 주최자를 바꿔가며 몇 번이고 이 짓을 반복한다.


  동네에 이르러 인파가 줄어들고서야 태희는 다시 아랫배를 내밀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어둑한 하늘 아래 얼굴이 파리해지고 핸드폰의 전자시계가 11시에 가까워질수록 등과 겨드랑이에 식은땀이 맺혔다. 외출할 때마다 시한폭탄 하나쯤 쥐고 나온 느낌. 태희의 모든 것에는 데드라인이 있다.

  태희는 날 때부터 귀속돼 있기 때문에. 10달 동안 그녀의 몸을 지은 단 한 사람의 사랑에만 사랑으로 보답할 수 있도록, 철저히 프로그래밍되었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 배에 꿰인 줄은 점점 더 팽팽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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