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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lin May 19. 2023

24살, 시골에서 뭘 하며 살까요?

 

 시골 살이가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다. 요즘은 도시 생활을 다 접고 일부러 시골로 내려와 마음의 치유를 얻고자 하는 젊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무래도 세상의 빠른 속도에 맞춰 걷다 넘어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일에 치여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의와 타의는 너무나 다른 마음을 갖게 한다. 

 매번 삐쭉대는 입으로 20대의 청춘을 이곳에서 갇혀 보내야 하냐며 괜히 투덜댄 적도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내 눈은 끝없이 푸른 하늘과 초록이 무성한 나무를 향했다.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는 듯했으나 며칠 동안 이 동네를 누비며 어떤 공간을 발견하고 사랑해야 할지 

나는 우리 식구 중 누구보다 깊게 고민했다.




운동장

 가로등이 비추는 샛길을 따라가다 보면 집 앞 초등학교에 있는 운동장은 내 밤 산책 친구이다. 

프랑스에 다녀온 이후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며 늘 초연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안일한 평화 속 갑작스러운 풍파에는 주춤할 수밖에 없다. 

  잠잠했던 집 담장으로 초겨울부터 거짓말 같은 파도가 몇 번 쳤다. 가족 간의 의견 충돌 끝에 삼촌의 파업, 사촌네와 얼굴 붉힐 일로 집안을 한바탕 뒤집어 놓은 동생이 돌연 포기했던 축구를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선언으로 달에 백만 원이 넘게 드는 지출의 연속. 가장이던 엄마의 전 직장에서 이상하게 얽혀버린 재판, 패소할 시 3년 동안 취업정지라는 큰 바위가 우리 집 앞에 떡하니 놓여있었다.

 여기에 발을 묶고 서서 어떻게든 버티자 다짐했지만 나는 습관적으로 함께 파도를 맞아 줄 사람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사 온 후 기쁘든 슬프든 감정이 흐려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얼굴을 보지,

당장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만날 수 있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 한 분을 붙잡고라도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잠잠히 내려놓고 문을 열어젖혀 운동장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과부하 걸린 생각 주머니를 움켜쥐고 무작정 트랙 몇 바퀴를 걸었다. 공항이 가까워 비행기가 유독 잘 보이는 밤에는 승객들의 안녕과 목적지가 궁금했다.

 일 년 전에는 분명 나도 저 안에 있었지만 이제는 마치 내가 닿을 수 없는 세계처럼 느껴진다.

 거대한 고민들이 뭉쳐서 눈덩이로 불어날 때는 내 상황과 상관도 없는 노래를 들으려 이어폰을 낀 후 비행기 밑의 작은 운동장을 걷는다.


동네 산 오르기

 지금보다 더 선선했던 가을에 등산을 시작했다. 나름 피크닉 분위기 내겠다고 주말이면 비몽사몽 일어나 유부초밥을 야무지게 싸 응봉산을 올랐다. '등산' 하면 중학교 시절을 빼놓을 수 없는데, 아토피에 좋은 건 뭐든 해 보겠다고 등교 전 엄마와 새벽같이 몸에 좋은 공기를 마시려 산을 탔다. 그때는 그렇게 가기 싫어 엄마가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는데 이제는 그 반대가 됐다. 먼저 기를 쓰며 몇 걸음 올라간 후 엄마를 찾으면 잘 보이지도 않은 나무 밑에서 헥헥 대며 올라오고 계셨다. 십 년의 세월은 많은 게 아닌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운동장을 걷는 것으로 위로가 안 될 때는 백팩에 물 한 통과 수첩 한 권을 넣고 응봉산을 올랐다. 입구 앞 끝없는 계단을 오르며 등산은 시작된다. 가을의 나뭇잎과 난생처음으로 본 행여. 힘이 부칠 땐 중간 코스에 있는 작은 벤치 의자에 벌러덩 누워 버린다.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여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웃음 섞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앉을 데가 없다며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교가 베인 나의 몸은 자연스럽게 벌떡 일어났다. 몇 번이고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참다 보면 정상에 올라가면 작은 동네의 전경이 펼쳐진다. 춘향전에 나올 법한 그네와 꼭대기에 놓인 정좌가 보인다. 정좌에 앉아 수첩에 쓰고 싶은 말들을 쓰다 보면 어느새 힘든 시간도 다 써 버리게 된다.



도서관

 저번 글에서 얘기했지만 어두운 굴다리를 지나 보이는 작은 도서관이다. 나름 휴게실과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열려 있는 것 같다. 회원증을 만들기 위해 명함 사진을 내밀었는데 만들다가 직원이 잉크가 잘못된 것 같다며 내 얼굴이 빨갛게 피칠갑된 회원증을 보여주었다. 바꾸기 귀찮아서 잘 쓰고 있는데, 타이핑 불가능한 열람실에서는 늘 모범생 할아버지가 같은 자리에 앉아 투박한 손으로 노트북을 타이핑하신다. 귀가 예민한 사람이라면 민원을 넣었을 게 분명한데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면 그 정도쯤은 눈감아 주는 시골의 넓은 아량이 느껴진다. 얼마 걷지 않아도 도서관에 올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광역시에 살았을 때는 도서관의 규모는 크지만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귀찮음이 있었는데, 차라리 작지만 가까운 도서관이 좋다. 어차피 도서관이 커 봤자 그곳에 있는 책을 다 읽을 수도 없다.


휴게소

 엄마의 아는 지인께서는 우리 집 근처에 왔다가 휴게소를 걸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사실 우리 집 12층에서 베란다를 보면 휴게소 팻말이 보인다. 그런데 휴게소를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가끔 간간히 드는 아르바이트 사이트 공고에 휴게소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는 것을 봤지만 당연히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나는 재미있는 산책을 했다. 풋살 경기장에서 걷다가 그 캄캄한 시골길을 걸어 휴게소 뒤편으로 가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Q.  "휴게소에 근무하는 직원은 어떻게 출퇴근할까?"

A. 보통 휴게소 뒤로 일반도로와 연결된 길이 숨겨져 있다. 원칙적으로는 직원이 아닌 외부인은 뒷길 출입이 불가능하지만, 인근 주민의 편의를 위해 개방하는 곳도 있다. 이러한 곳은 이용해도 괜찮으나, 휴게소 경내로 주류를 반입할 수는 없다. 


 그 인근 주민이 내가 됐다. 휴게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벤치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고 있으면 멀리에서 온 사람들 덕분에 꼭 놀러 온 것처럼 마음이 들뜬다. 그 분위기는 이상한 용기를 주고 울컥 모든 걸 고백할 수 있게 만든다. 엄마에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넌지시 얘기했던 그 휴게소의 벤치와 풍경을 다음엔 카메라에 담아 오고 싶다.



책방

 아르바이트 가는 길목에 책방이 하나 있다. 아침에 덜 뜬 눈으로 지나다니다 보니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알라딘 서점처럼 계단을 오르는 벽지에 책에 관한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시골에 끽해야 작고 낡은 책방인 줄 알면 오산이다. 최신식의 세련된 건물과 인테리어를 마주하고 놀랐다. 카페 겸 책방이니 북카페라고 부르는 듯하다. 사장님께 이 공간에 대해 물으며 글 얘기를 하다가 결국 동화를 쓰시게 됐다며 당신의 글을 나에게 건네주셨다.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북카페를 차리게 되셨냐는 나의 물음에 법대를 나와 남편을 만나고 시골에 왔지만 서점 하나 없는 것이 불편하여 결국 북카페를 차리게 되셨다는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하고 싶은 것을 이룬 사람이니까. 이미 작게 열고 있는 소모임에 나이 많은 사람들밖에 없지만 젊은 사람이 소모임에 나오면 좋겠다는 얘기도 했다. 얘기를 하고 각자 자리에 앉아 글을 쓰다 보니 둘만 있던 공간에 자리를 비우시게 됐다. 아들이 오기 전까지만 가게를 맡아달라는 말씀에 어차피 있으려고 했던 자리를 의무심을 가지고 맡게 되었다. 이제는 사장님 아들의 얼굴까지 외웠지만 책방에 들를 때면 나도 이 공간을 차리게 될 수 있을까 보이지도 않은 미래를 생각해 본다.


 도대체 시골에서 뭐 하고 사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산책하고, 책 보고 글 쓴다고 말한다. 물론 매일 그렇게 사는 건 아니며 놀고 싶을 땐 시내에 나가 화려한 것들을 둘러보기도 한다. 너는 여유 있는 삶을 사는 것 같아 부럽다고 말하지만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과 시간을 언제까지 가질 수 있을진 모르겠다.


 나중에는 시간에 메여 금 같은 버스를 한 번 놓치면 이 동네가 싫어질 것이고, 시골에는 없는 것들을 찾으러 시내로 나가야 하는 일이 번복되면 동네가 번거롭고 답답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느림의 미학과 기다림을 알려 준 이 동네를 사랑하게 되었고, 훗날 동네를 떠나게 된다면 시끄러운 도시 속에서 이 평화와 고요함이 아주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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