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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사 Jan 23. 2024

도무지 진지해지지 않는 이야기

한국이라서? 지인들 사이라서? 결국 언제 어디에서 꺼내봤자 무의미한 얘기


나의 몸은 잡동사니로 꽉 찬 창고나 다름없는 구조이다.

이 글은 그 안쪽의 별다르지 않은 내용물들 중에서도 좀처럼 맛보기 쉽지 않은.

솔직히 애당초 별로 맛보고 싶지도 않은 것을 서술하는 글이다.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에 앞서 나의 이해를 돕기위해 그것들을 풀어서 써보는게 먼저겠지.

나에겐 도무지 내 주변의 남들과는 겹치지도 않고 겹칠 수도 없는

두 가지의 곰팡내 나는 성격이 있다.


첫째. 남들과 동떨어져 있는 시간을 귀중하게 느낀다.

두 번째. 언제 어떻게 죽어도 아쉽지 않다는 생각이 꾸준히 든다.


이 두 가지는 어떻게든 고쳐보려 하는데도

마치 봄날의 새싹처럼 지겹게도 고개를 내미는 나의 특이한 점들이다.

복잡한 것들이 교차하여 만들어지는 사람의 감정이란 것을 한마디로 축약해 놓자니 내가 적어놓고도

어디 가서 이렇게 툭 꺼내놓으면 과장 좀 보태서 당장에 병신취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다.

그래서 글의 제목을 도무지 진지해지지 않는 얘기라고 적어놓기도 했고.


지금까지 만나본 어떤 사람들과도 이 주제로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끌어나갈 어휘력이 나에겐 없다.

설령 그 정도의 능력이 내게 있다고 쳐서 대화를 이어나가도 주제부터가 남의 곰팡이다. 정작 듣는 상대는 지구 반대편을 여행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브런치에 써놓은 글의 9할도 모두 내가 나에게 말을 거는 글이다.

오늘 쓰는 글도 언제나처럼 그런 형태이다.




두 가지 모두 통상적으로 어엿하고 바르게 자란 사람이라면 가지지 말아야 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가치관이다. 그중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고립시켜 한정적이고, 딱딱하고, 형식적이고 폐쇄적이게 만드는 이른바 독 중에서도 무미무취이지만 사람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극약이나 다름없는 성격이고 두 번째는 허무주의적이고 비관적이어서 나라도 그리 가까이 지내고 싶지는 않은 성격의 대표격이다. 아마 나이대에 국한되지 않고 죽음에 관한 무거운 주제에 대해 앞뒤 생각하지 않고 쉽게 내뱉는 나에겐 그 주제가 전혀 무겁지 않다. 직계가족을 떠나보낸 경험이 없기에. 사람을 마주하면 이 사람은 기본적인 게 갖춰진 사람인 건가 하여 코웃음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라 자신한다.

나도 이런 나를 부감하기란 그다지 쉬운일이 아니기에 3자의 입장에서는 해명처럼 들리는 해석을 해보려 한다. 그 과정이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있는 그대로만이라도 써내보고 싶다.


첫 번째의 경우를 설명하자면 나는 애초부터 할당된 메모리가 부족한 사람이다.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을 잘 해내기 어려워하는 뚝 부러진 것 같은 어딘가 모자란 사람이고 이는 타인을 마주할 때 특히나 메모리의 절대적인 소모로 이뤄진다. 여기서 좀 이상한 점은 그렇게 피곤해하는 타인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분명 내 기억에 행복했던 부분들과 인상 깊은 부분들의 배경에는 꼭 소중한, 소중했던 타인이 존재한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님에도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기피하는. 대충 보기론 모순적이고 이해 불가능한 특성이다. 남이 보기에는 그럴지라도 뭐 어쩌겠는가. 타인과 함께하는 행동 그 자체가 꺼려지는것은 도무지 바꿀 수가 없더라.

말은 이렇게 해도 그때그때 필요하다 여기는 상황 속에서 나의 심적 울타리 안쪽에 존재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 시간에 포함시켜 흘려보낸다. 그 하루 중 반절이 채 안 되는 시간을 제외하고선 통상적으론 직계가족에서부터 길거리 강매자까지 어떤 사람이든 내 의식과 개인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포함시킬 생각도 없다.

그럼에도 대외적으로는 미소와 긍정을 탑재하고 그들을 대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니까 그렇게 한다.

그런 그들과의 관계가 간혹가다 가까워지고 편해질수록 가면뒤의 모습도 꺼내지만 결국 글에 써져 있는 부정성은 오늘도 나만이 천천히 되짚는다. 아무튼 나는 오늘 안심하고 혼자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 감사하다. 이렇게 서술하니 사람으로서 어떤 점이 잘못되었다 느끼지만 글로 한번 쓰고 보니 더더욱 어거지로 고치고 싶지는 않은 나의 소중한 성격이자 특징이다.

내게 있어 중요시되는 한 가지만 지키면 된다. 타인과의 교류 중에 그들에게 내 성격을 묻히지 않는 것.

결론적으론 이것은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며. 필히 나를 좀먹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에 힐링한다.

일단은 그거면 됐다.

사족으로는 사람을 구태여 마주할 필요를 이젠 느끼고 싶어진다. 내 주변이 달라지려면 나부터 달라져야 하기에 그 전까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초점을 풀리게 하지만 않으면 되겠다 싶어 이쯤으로 마무리 짓는다.



두 번째는 '허무주의' 같은 이해를 돕기 위해 풀어서 써진 단어나 문장으로 서술할 필요조차 없다.

자살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죽여줬으면 하는 것도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픈게 아니라 다만 필요에 의한 것이거나 피하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면 죽어도 딱히 상관없다는 느낌의 말이다.


물론 다른 이들처럼 나도 나의 미래가 궁금하고, 그만큼 행하고 싶은 것도 많고. 앞으로 무한히 펼쳐질 세상의 모습도 충분히 기대된다. 막상 죽음 앞에 서면 다리부터 풀려서 머리를 숙이고 벌벌 떨어대기도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1분 후에라도 어떤 방법으로 죽던 결론적으로 크게 아쉬울 것도 없고. 오히려 후련한 부분도 분명히 있을 거라 믿는다. 앞에 서술했듯 당장에 자살을 하고 싶다는 소리도 아니고 피하지 못하는 죽음이라는 가정이라면 그것에서부터 도망치려고 지랄발광을 하는 경우는 없다는 딱 거기까지인 생각이다.

살고 싶은 마음도, 죽고 싶은 마음도 조금씩 옅어지는 또 하나의 애매한 상태에 빠져버린 걸까?

그것은 물론 내가 별것도 아닌 심장병이란 것이 악화되어 가는 채로 내 일상에 점점 녹아들어가는 판국이라 낙관적이게 되어버린 걸 수도 있지만 지금껏 큰 결핍 없이 과거를 보내온 게 핵심적인 영향을 끼쳤을 거라 보는 바이다. 무엇보다도 한 가지 더 보태자면 나는 나를 증명하기보다는 내 상상의 증거들을 구현하는 게 목표점인 사람이다. 아직까진 그것들을 내가 바라는 온전한 형태로 세상에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개인 메일, 개인 노트 속에 미숙하고 일차원적이지만 그럼에도 엄연히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죽는다는 가정이어도 나의 형태는 여전히 남아 실존한다.

어찌 됐던 내가 이런 자연스러움과 동시에 희한한 성격을 다소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사람의 시간이란 건 한정적이기에 그 속에서 발버둥 침으로써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죽음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 어딘가 쉽게 만족하고 마는 경향이 있어 이대로는 내가 바라는 바를 이뤄낼 정도의 성장을 산출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에서부터 왔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경향을, 성격을 도무지 버려내려야 버려낼 수가 없다. 실제로 아무리 이에 대해 부정해 봤자 죽는다는 건 내 입장에서 그다지 막장에 다다른 것처럼 느껴지지 않기에 그냥 겸허하고 침착하게 오늘을 바라보는 것이 최선처럼 느껴지고 그렇기에 이런식의 관점을 가지고선 큰 파문 없이 살고있다.


나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글을 썼을까? 나를 분석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위로받고 싶어서일까? 나름 다각도로 접근해 봤지만 결국 요동치는 생각을 써내는 것이 너무나 즐겁기에 이렇게 쓰게 된 것 같다. 한 달에 거울에 나를 비쳐본 횟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나에게 이렇다 할 관심이 없지만 정작 거울에 내 마음을 열심히 비춰보는 이 이중성이 나는 아무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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