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범해줘. 날
깨트릴 수 없는 벽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어떠한 철포도, 어떠한 협상도 나를 흔들지 못하니
겨우 단 한 명의 꾀죄죄한 상인이 내 수십 갈래의 창살을 들어 올리는데도.
흔들어줘. 날
십수백 년이고 한 풍경에 붙박여만 있던 나야.
의미를 가지지 않았던 돌조각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지금도 성벽의 벌어진 틈 사이로 너를 주시하고 있어
그러니 날 뒤흔들어 하늘로 흩어지게 해 줘.
침식해줘. 날
비바람이 나를 상처투성이 돌담으로 바꾸는게 불안해 보여?
사실 가장 무서운 것은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민들레의 씨앗인데.
생명은 어떤 조그만 틈새에서도 비를 먹고 자라.
넌 무얼 먹고 자라?
함락해줘. 날
강철은 견고할수록 여러 조각으로 부숴지지.
영원 앞에 감화되지 않는 이는 없었어.
그렇다면 함락으로써 그 영원을 부숴줘.
무엇보다도 장엄한 성벽인 지금 너가 딛고 있는 땅으로 날 되돌려줘.
정복해줘. 날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이는 그만큼 뛰어나지.
너에게 그러한 여유가 있을까. 자신 없으면 한번 방법을 가리지 말아 볼래?
너가 어떻게 구겨지는지 보고 싶어.
뭉개지는 건 나일까, 아니면 너일까.
그는 무엇을 둘러싸고 있을까.
그는 무엇을 방비하고 있을까.
그는 왜 그렇게 고고해져야만 했을까.
실은 깊은 의미도 없어.
어떤 대책도, 방비도 해봐야 수년 안으로 무너지는데 뭐
그러니 나비 같은 유연성으로 너만의 위기를 다뤄봐.
그러다 허리가 두 갈래가 나도 주어진 운명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