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탁한 필터를 뚫고 이따금씩 어딘가의 표면에 맺히는 렌즈가 하나 있다.
겨우 한 방울에 불과한 감정의 투시
그럼에도 그 한 방울은 원래부터가 세상의 빛을 보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다.
다만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난 눈물이 많았었다
그리고 지금도 많다. 쉽게 내보이는 눈물에서 이제는 남들은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만 다르다.
그것은 유리체를 뚫고 나와 빛을 흡수하였다.
이윽고 뚜렷한 상이 맺혔다.
난 결국 글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싶을 뿐
그 두 가지만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느지막하게 내어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그 두 개만이 나에게 웃어줄 수 없기에 나는 시편時便을 포용하고 만다.
그래. 잠깐이다. 숨을 삼키며 이것들을 유예하며 살아간다.
결국 또 무언가를 뚫고 나온 볼록렌즈가 여기까지 당도했다.
역시 쉽게 감동하고 깊게 기약해버리고 만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오만하게 단정 짓는다.
여기는 여러 것들이 못났기에 아름다운 것들이 더욱 부각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어찌 이리도 고상한 설계일까 감탄하고 만다.
그렇다면 역시 포기하지 않아야겠다.
단 한 겹뿐일지라도 내 유리체에 렌즈가 묻었으니까.
혼탁하고 촘촘한 필터를 어렵사리 뚫어내어 당도한 유리와 같이 투명하고 맑은 렌즈. 밋밋한 칠색의 가시광선의 한계가 이 렌즈를 뚫다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난 그것을 빛이라 부르겠다. 그런 보통에서 벗어난 빛을 잠깐이라도 맛보게끔 해주는 눈물이란 것을
그저 가볍게 손으로 훑어 내버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