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린 Mar 28. 2023

사직서 내러 가는 길

워킹맘 실패자

고민이 길어서였는지 결정은 빨랐다. 가슴속에 수년간, 족히 십 년은 묵혀왔던 사직서는 빛 속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사직서를 인사팀에 낸 다음날, 팀장에게 뭐라고 얘기할지 고민했다.


발전 없는 커리어, 비전 없는 회사, 낮은 금전적 보상..

뭐라고 얘기해야 프로페셔널해 보일까 궁리했다. 결론적으로는 매우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게 징징 울다

나왔다. 이런 이성적이지 못한 ISTJ라니..


입사 때 사수였던 팀장은 거의 십 년 간 나의 팀장이었고, 내가 회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멘토이자, 인간적으로도 좋아하는 회사 선배이다. 신입 때는 그녀가 무서웠던 적도 있지만 사실 합리적인 일처리와 달리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초고속 승진으로 어린 나이에 팀장이 되었지만 업무도 워킹맘으로서도 실수 하나 없어 보이는 그야말로 완벽해 보이는 사람을 나는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런 분에게 나는 못하겠어서 내려놉니다.. 를 말하기가 내 입장에서도 쉽진 않았다.


저는 실패자입니다.

워킹맘 실패자


원래 욕심이 많은 내가 변했나 했더니 변하지 않았다. 완벽주의 성향인 나는 복직 후부터 집안도, 육아도, 업무도 뭐 하나 제대로 못한다는 느낌으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욕심만큼 안 되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맞벌이로써 전우애를 얻지도 못해 혼자 무너져 결국 3년 만에 우울증으로 병원까지 다녔다. 만신창이가 됐고, 돈이고 뭐고 너덜너덜한 나 자신을 추스르자니 뭔가 하나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딸이나 배우자, 엄마를 포기할 순 없으니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건 직장인 타이틀밖에 없었다.


퇴사의 이유는 수십 가지지만, 결국 퇴근길에 돌아보니 나에게 남은 건 워킹맘 실패자라는 낙인이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포스트 우울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