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왜 연극한다고 얘기를 안 했어?
당신 첫 데뷔였잖아. 드디어 여배우!
말해줬음 시골 안 내려갔지!"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원망스럽다는 듯
꺼낸 말에 나도 그제야 깨달았다.
"아~ 맞다! 작년에 '해설'이랑 '조명'만 했었지."
왜 말하지 않았냐고?
관객석을 내 지인이 아니라,
정말 관객들로 채우고 싶어서?
괜히 몇 만 원짜리 꽃다발 들고 오는 게 미안해서?
툴툴거리는 남편 덕에 어제 공연이 다시 생각나 스마트폰을 꺼내 연기하는 사진들을 들여다봤다.
안 하던 인스타까지 뒤져댔다. 놀랍게도 누군가 정말 좋은 연극이었다며 관람평을 남겼다.
있는 힘껏 하트를 눌렀다.
하트를 하나밖에 누를 수 없어 정말 아쉬웠다.
벌써 어제라는 추억의 한 편으로 사라져 버린 연극 한 편인데, 희한하게도 어제 씹어먹었던 도라지 향내가 잔잔히 다시 풍겨오는 것 같았다.
올해 10월 26일 오후 4시,
우리 극단 '불나방'에서 올린
연극의 제목은 <고도리 사건 25시>였다.
누가 알까?
이 연극이 비록 지역주민들을 위한 무료 나눔 공연이지만 얼마나 많은 땀과 열정이 들어갔는지?
올해 1월 열렬한 대본 토의를 시작으로,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모였다.
남들은 불금이라는데, 우리는 불나방!
그렇게 오랜 시간 마음 담아 온 연극이
오로지 딱 두 시간 꽃핀다는 것을 누가 알까?
일 년에 겨우 두 시간만
배우라고 불리는 평범한 지역 주민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나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이 연극이 큰 수익을 남기거나
누군가를 대배우로 만들진 않았지만,
단역으로라도 참여했다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선 시나리오 자체가 정말 좋은 작품이었다.
비록 <고도리, 비상>이라는 원제를 <고도리 사건 25시>로 바꿨지만, 김수미 작가님 의도를 제대로 살리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고도리'라는 이름의 매우 평화로운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축제 분위기로 들썩이고 있다.
내일이면 마을 이장이 도지사에게 가서
'10년간 범죄 없는 마을'로 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시가 1억 원짜리 산삼을 도둑맞았다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마을엔 한바탕 소동이 시작된다.
'10년간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명예가
무너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이장부터,
산삼 훔친 도둑으로 누군가를 고발하거나, 돌아가며 누명을 쓰는 마을 사람들.
서로를 의심하며 반목하는 마을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평화로운 그 '고도리'가 아니다.
갈등의 갈등 끝에 결국 산삼은 사실 도둑맞은 것이 아니었다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된다.
도둑맞았다고 주장한 남자의 부인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가져간 것으로,
또 그 산삼 역시 사실은 도라지였다는 결말에 허무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연습하면 연습할수록
이 스토리가 진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우리가 사는 게 이렇지 않은가?
모두가 각각 '산삼'이라는
자신만의 어떤 거대한 가치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산삼'을 얻어내기 위해,
누군가를 밟아 올라서거나
혹은 그것을 빼앗아간 사람이 있다며
길길이 날뛰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 삶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산삼'보다 도라지가 더 많다.
향이 좋은 도라지.
생으로 먹어도, 무쳐먹어도 맛있는 도라지.
나의 삶에 어떤 도라지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다 우리 극단 사람들을 생각한다.
자기 삶의 도라지가 뭔지를 알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일 것이다.
연기초짜들에게
연극의 혼을 불어넣으려 노력하는 감독님.
그리고 항상 단원들 챙기랴,
연극 소품 챙기랴 제일 분주하던 회장님부터
공연 전날 리허설하다 쓰러졌으면서도 끝까지 연극에 함께한 '권씨 아줌마'......
누구 하나 향내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우리 도라지 같은 마을 사람들,
불나방 극단의 단원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10월의 그 어느 향긋한 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