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여성풍경
옛 영화를 보다 보면 줄거리도 흥미롭지만 카메라에 담겨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생활상과 당시 사회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36년에 제작, 상영된 <미몽, 迷夢>이라는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2005년경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견한 한국영화 필름이다.
양주남감독의 데뷔작이자 경성 촬영소의 여섯 번째 발성영화로 문예봉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된다. 주인공 애순(문예봉)은 가정주부인데 자신이 ‘조롱에 든 새’라며 답답해하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긴다. 남편은 이러한 애순을 못마땅해하고 쫓아낸다. 정희라는 어린 딸이 있지만, 애순은 미련 없이 집을 나와 백화점에서 만났던 남성과 애인 관계로 호텔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애인이 자신의 신분을 속인 무일푼이며 강도짓을 하려는 것을 알게 되자 경찰에 신고해 버린다. 그리고 애순은 무용 공연에서 보았던 남자 무용수에게 새로운 관심과 욕망을 갖게 된다. 무용수를 따라가려고 급하게 택시를 따라 쫓아가다가 그 차에 자신의 딸 정희가 치이게 된다. 급히 병원에 옮겨 딸 정희는 무사히 치료받지만 죄책감을 느낀 애순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게 된다.
1930년대 영화라고 보기에는 다소 파격적인 스토리이지만 여기에는 당시 신여성들에 대해 허영심이 많고 자유분방하다고 비난하던 사회적 담론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내가 더 주목하게 된 장면들은 30년대 중반의 서울 풍경과 영화에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모습의 여성 직업군들이었다.
영화에는 애순의 쇼핑 장소인 화신백화점의 데파트걸이 등장하고, 사무실 장면에서 타이피스트도 볼 수 있다. 미용실을 방문한 애순의 머리를 단장해 주는 미용사와 병원 장면에서 간호사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애순이 보러 간 무용 공연에서 남녀 무용수도 등장한다. 애순은 남성 무용수에게 반하게 되는데, 영화에 등장한 남자 무용수는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남성무용수인 조택원이라고 한다. 반나의 의상을 입은 멋진 현대 무용과 남녀 무용수를 볼 수 있다.
애순이 떠난 가정에서 정희를 돌보고 가사를 담당하는 가사 사용인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 초기까지만 해도 구관료, 양반가에서는 집안에 하인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1920년대부터 신분상 하인이 아닌 새로운 고용 관계에서 중상층의 가정에서 일하는 가사사용인이라는 직업 범주가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1930년 <조선국세조사보고>를 보면 가사사용인은 직업 대분류 기준의 한 항목으로 분류될 정도로 중요한 직업 집단이었다. 이 시기 가사사용인은 경성, 개성, 대구, 부산, 평양 등 도시지역에서 그 비율이 높았고, 혼인상태별로는 기혼보다 미혼의 비율이 높았다. 1930년 가사사용인의 혼인상태는 전체 91,911명 중에서 미혼 62.7%, 기혼 22.2%, 사별 12.4%로 미혼이 압도적이었다.
1930년대 여성들인 근대적인 새로운 직업세계에 진출하면서 돌봄을 담담하는 가사사용인의 증가와 변화의 맥락은 어쩌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일-가정 양립의 갈등을 보여주는 변곡점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군과 변화하는 시대상을 글로만 연구하다가 한꺼번에 영상과 이미지로 만나면서 1930년대 꿈틀대는 근대와 여성의 변화를 새삼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영화가 갖고있는 힘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