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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 Aug 22. 2023

시칠리아에는 예쁜 해변만 있는 줄 알았는데

Sicilia

  좋은 곳에서 머무르는 것보다 원하는 곳으로의 이동이 주가 되는 캠핑카 여행의 특성상, 좋은 것보다는 평범한 것을 보는 날이 더 많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느덧 캠핑카 여행 2년차에 들어선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1300km를 달려 도착한 시칠리아에서 이틀째 이런 풍경을 보고 있다니.



  우리는 항구가 있는 메시나를 벗어나서 북쪽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가도 가도 해변인지 아닌지 모를 흙 섞인 자갈밭이 이어졌다. 뾰족뾰족 발을 찌르는 마른 풀들이 듬성듬성 난 황량한 해변에는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물빛도 그저그런.. 아무리 시칠리아가 넓은 섬이라지만, 그러니 이런 곳도 있는 거라지만 거의 100km를 가는 내내 이럴 수가 있나? 어디 다른 섬으로 잘못 온 거 아닐까, 이런 곳이 시칠리아일리가..


  우리를 더욱 절망케 한 것은 예쁜 해변은 고사하고 캠핑카를 세우고 쉴 곳조차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넓은 주차장이 있고 넓은 공터가 있어도 어김없이 캠핑카 주차 금지였다. 찾아가는 족족 캠핑카 금지 표지판을 맞닥뜨렸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는데, 남편은 더 당황한 눈치였다. 사용하는 앱에는 분명 이 모든 곳들이 캠핑카 주차가 가능하다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타오르미나, 시라쿠사 등 남쪽 해안의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들을 포기하고 북쪽 해안으로 이동한 건 남쪽 해안은 무료로 캠핑카를 주차할 곳이 거의 없고 캠핑장은 비싸다는 남편의 주장 때문이었다.


  “우리는 돈을 아껴야 하잖아.”


  그 말에는 대적할 말이 없었다. 시칠리아까지 와서 캠핑장 비용 좀 아끼자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을 가지 않는 게 더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싸워 봤자 결국 운전하는 것도 잘 곳을 알아보는 것도 남편이라 마지못해 동의했었다. ‘돈을 아껴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 북쪽 해안도 남쪽 해안만큼은 아니라도 예쁘겠지. 그래도 명색이 시칠리아인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남쪽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와서 맞닥뜨린 현실은 이거였다. 예쁜 해변도, 무료로 잘 곳도 없다. 새로 생긴 캠핑카 주차 금지 표지판을 맞닥뜨릴 때마다 이럴 수가 없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남편에게 슬쩍 농담을 던졌다.


“시칠리아 마피아들이 캠핑장 사업을 시작한 거 아냐?”


  시칠리아에 도착한 첫날은 메시나 도 북부의 바닷가 마을에 캠핑이 가능한 자투리 해변이 있어서 거기서 하루 잤다. 그때는 마을 바깥의 황량한 자갈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시칠리아까지 왔는데 이런 곳이라니 기대에 차지 않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메시나 도만 벗어나면 시칠리아 특유의 예쁜 해변이 줄지어 펼쳐질 줄 았았으니까. 그런데 그곳을 떠나고 보니 그만한 곳을 찾기도 힘든 것이 냉혹한 현실이었다. 예쁜 해변은 커녕 쉴 곳도 없어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견디며 계속해서 이동했다. 푹푹 찌는 캠핑카 안에서 참치캔을 따서 끼니를 해결하면서. 이래서야 여행이 아니라 비싼 기름을 낭비하며 하는 고행이나 다를 바 없었다.


왼) 첫날 잔 곳, 마을 쪽에서 찍어서 괜찮아 보이게 나왔지만 그냥 자갈 공터였다 / 오) 이런 곳조차도 캠핑카 주차 금지


  둘째 날, 세 시간을 이동한 끝에 도착한 곳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절대 차를 세우지 않았을 황량하기 그지없는 해변이었는데 버려진 공터나 다름없는 이곳 주차장에도 어김없이 캠핑카 주차 금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적힌 날짜를 보니 심지어 오늘부터다. 하하.. 우리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다시 차를 몰아 어느 작은 마을의 공용주차장을 찾아갔다. 다행히 자리도 널널하고 캠핑카 금지 표지판이 없어 한시름 놨다. 일반 주차장이라 문이나 창문을 열어 둘 수 없지만 그래도 잘 곳을 찾아서 다행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캠핑카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 보니 이 마을은 낡은 연립주택이 몇 채 있을 뿐, 구경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민들도 대부분 도시로 출퇴근을 하는 모양으로 거리에 사람도 없고 가게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별 수 없이 걸어서 멀지 않은 해변으로 갔다.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자갈해변에 주변 환경도 엉망이었고 해변 저쪽 끝에는 공장이 보였다. 한숨이 나왔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시칠리아 섬에 와서도 우리는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구나. 돈은 돈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우리의 가난한 캠핑카 여행에 깊은 현타가 왔다. 이렇게 아끼는데도 구멍이라도 난 듯 빠르게 줄어드는 통장 잔고, 무더운 여름에 며칠씩 샤워도 못하고 캔이나 따 먹으면서 하는 이동, 그럼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별 볼일 없는 풍경.. 이 모든 것이 나를 깊은 회의감에 빠뜨렸다. 그냥 좋은 데 호텔 잡아서 여행이나 몇 번 다녀오고 말 것을 이게 다 뭐하는 짓이지.


  해가 져도 캠핑카의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아서 저녁을 대충 해결하고 다시 해변으로 나갔다. 내내 표정이 좋지 않은 나에게 남편이 뭐라고 말을 건냈지만 무슨 말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날들도 있는 거지, 내일은 괜찮을 거야.. 대충 그런 얘기였을 것이다. 나도 안다. 아는데도 어쩔 수 없이 속이 상했다. 고집을 세워 굳이 이쪽으로 경로를 잡은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해서 대답을 하지 않고 바다만 바라봤다.


  한참을 서로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아무것도 깔지 않고 대자로 누워 있자니 온몸에 닿는 자갈의 차가운 감촉에 슬며시 기분이 좋아졌다. 자유로운 느낌. 사실 그러고 보면 이 여행을 시작할 때 원했던 건, 단지 해변에서 해변으로 다니며 자유롭고 고독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거였다. 그게 꼭 유명하고 예쁜 해변일 필요는 없었다.


“뭐야, 왜 그래?”

“누워 봐. 아~ 시원하다.”


  남편은 처음에는 이 여자가 왜 이러나 하다가 이내 쿡쿡 웃으며 내 사진을 찍었다. 나도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그래, 이런 별볼일 없는 경험을 하는 것도 캠핑카 여행의 과정인 거겠지. 아니, 오히려 특별한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남편, 이 동네 사람 말고 이 해변에 누워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거의 없겠지?”


  남편이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표정을 짓다가 곧 내 의도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마주 보며 미소지었다. 이 별볼일 없는 해변을 방문한,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이야 우리는.


  그날 우리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 시칠리아의 못난 뒤통수 같은 해변에 누워, 바다 위로 저무는 노을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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