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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Sep 19. 2023

공감하며 살고 있습니까?

당신과 나, 우리. 진짜 공감에 관하여




얼마 전까지 나의 마음을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만드는 단어가 있었다. "공감"이다. 



최근 우연처럼 독서모임을 위해 읽거나 개인적 관심사로 읽은 책들 모두 “공감”으로 수렴했다. 읽는 내내 양쪽 어깨 가득 나의 무거운 짐, 공감에 대한 고민이 함께였다. 다행히도 여러 편의 책을 읽은 끝에 한 동안 나를 괴롭혔던 공감과 비로소 화해할 수 있었다. 혹 지금 이 순간, 공감이 어렵다면 잠시 내 이야길 들어보시라.








보통 공감에 대해 검색하면 [대상을 알고 이해하거나, 대상이 느끼는 상황 또는 기분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심적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를 따라 표면적으로 공감을 받아들이면 특별히 불편한 것이 없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울고 웃는 일은 우리의 삶 전반에 녹아 있다. 



이처럼 자명해 보이는 공감은  때때로 나를 불편하게 했다. 스스로가 공감력이 낮은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상담이나 면담 장면 같은 직업적 상황은 논외로 두고, 평범한 일상 속 공감 말이다. 상대와의 물리적·심리적 거리감 문제는 아니다. 때로는 밀접한 사람과의 대화 중에서도 한계들이 고개를 들었다. 



상대가 꺼내는 그 마음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해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홀로 발을 동동 구를 때가 있다. 같은 공간 속 나 홀로 외딴섬이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한숨을 쉬기도, 함께 눈물짓기도 하며 동행하는 중인데 나만 고장 난 로봇처럼 버벅거리고 있다. 보통 그런 순간들은 첫째,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거나 둘째, 나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피어나는 순간들이었다. 



내가 미처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앞에서는 감히 그 어떤 명함도 내밀 수 없었다. 도저히 '그 마음 내가 잘 알지'라고 할 수가 없다. 어설프게 위로의 말을 전하기엔 내 깊이가 너무 얕고, 그냥 이성적인 판단하에 현실적 대안만을 제시하기엔 내가 너무 선을 넘는 것 같다. 후자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나 혼자 아예 다른 경험과 감정 노선을 걷는 셈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이게 진짜 그럴 일인가? 그렇게 느낀다고? 진짜?' 막막하고 황당하다. 그럴 때마다 공감이 자연스럽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남들은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매끄럽게 감정의 물살을 함께 타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부자연스럽고 힘든가 싶다. 단순히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MBTI의 힘을 빌려 나는 F가 아니라 T라서 그렇다고 포장하기에는 영 시원하지 않다. F와 T가 단순히 그런 의미는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좀 더 근본적인 물음으로 회귀한다. 공감이란 대체 무엇인가. 고민스럽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공감 능력을 타고 난다. 그럴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은 거울 뉴런 덕분이다. 특정 행동을 수행하거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관찰할 때 흥분하는 전두엽의 뉴런을 말한다. 원숭이가 직접 바나나를 쥘 때나, 상대가 바나나를 손에 쥐는 것을 관찰할 때 똑같은 뉴런이 흥분한다는 뜻이다. 본격적으로 만 3세 이후가 되면 마음 이론을 획득한다. 다른 사람의 심적 상태를 추론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반창고 상자를 열었더니 반창고 대신 연필이 튀어나온다. 아이들은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즐거워한다. 이제 실험자가 묻는다. '상자 안을 본 적 없는 친구에게 이 상자를 보여주면, 무엇이 들어있다고 생각할까?' 만 3세 이전의 아동은 본인이 본 것 그대로 답한다. '연필이요!' 만 3세 이후의 아동은 웃음이 먼저 터진다. '반창고요!' 다음 친구들을 속일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나 있다. 타인의 관점을 이해한 것이다. 본격적인 공감의 시작이다.



우리가 아니, 적어도 내가 공감을 대할 때 장벽을 느끼는 지점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공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에 '나는 당신의 상황을 알고,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고, 때문에 지금 당신을 온전히 이해한다'라는 수동적 공감의 덫에 걸리고 만다. 어쩌면 이미 잘 발달된 공감 능력을 갖고 잘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덫에 걸리는 순간 내가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것만 같은 괴로운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공감은 수동적 감정 노동이 아니다. 누군가 고통받는 순간에 연민을 느끼는 것도 공감이지만,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알고 인정하는 능력 역시 또 다른 공감이다. '우리는 의견이 다르지만 친구가 될 수 있어'라는 열린 태도를 간과한 나는 그만 공감의 덫에 걸렸던 것이다. 그뿐일까. 자신의 말을 멈추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 서로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 협력하는 것, 상대에게 필요한 도움을 기꺼이 제공하는 것도 공감의 행동적 측면일 수 있다. 








다시 되묻는다. 공감이란 무엇일까. 머리로는 알면서도 오랜 시간 걸려있던 덫에서 풀려나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 내게 공감은 조금 더 선명한 거울이 되었다. 나에게 있어 공감은 '상대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는 것'이다. 네가 지금 이런 상태구나, 있는 그대로를 선명하게 비추어주는 것 말이다. 거울 뒷면의 나는 당신과 100퍼센트 똑같지 않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는 사실 당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오롯이 다 느끼지도 못할뿐더러, 당신이 겪고 있는 그 순간들을 태어나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신은 그럴 수 있겠다, 수용해 주고 인정해 주는 거울을 들고 상대 앞에 선다. 나와 너를 함께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나와 너의 다름을 받아들인다. 



이쯤 정리하고 나니 진짜 공감의 출발은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상대를 향해 들고 있는 마음의 거울을 돌려 그 앞에 내가 선다. 나를 있는 그대로 비추고 알아차린다. 나에 대한 솔직한 이해가, 수용이 가능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인정과 수용도 가능하다. 스스로를 자주 비추고, 마주하고, 들여다보며 이 거울을 반짝반짝 닦아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그대들과 연결되는 공감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일이겠다. 보다 선명하고 깨끗한 나만의 공감 거울을 가꾸기로 한다. 다음번 당신을 비출 때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따뜻한 거울로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릴 것을, 귀 기울일 것을 다짐한다.  

 




* 공감 이해에 큰 도움이 된 책, [장동선 외 4인 저, 행복은 뇌 안에, 글항아리]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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