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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Sep 11. 2023

언어 없는 언어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사소하지만 소중하게





아이를 등교시키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저 멀리, 아파트 현관 근처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커다란 몸이 눈길을 뺏는다. 출근복을 입은 채 주차장으로 향하다 말고 나를 발견한 남편이 나를 향해 머리 위로 두 손을 올려 좌우로 힘껏 흔들고 있다. 해맑게 웃으며 커다란 인사를 건네는 그 모습에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마저 담겨 있다. 속절없이 웃음이 터진 나는 일부러 더 과장해서 부끄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한다. 남편 덕에 오늘 하루 치의 행복이 아침부터 그득 채워졌음을 알아차린다. 소리 없이, 몹시도 사소한 언어들로 내게 사랑을 건네는 남편이다. 만남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가 예상치 못하고 선물처럼 받게 되는 남편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벅찬 마음을 안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나를 향해 두 손을 흔들던 남편이 서 있던 자리를 지나 집으로 향한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분홍빛 하트가 그림자처럼 피어난다.    




뼛속까지 심리학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심리학자 답지 않는 삶을 산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한다. 아니, 사람을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 그 자체를 믿지 못한다기보다는 영원불변의 진리 같은 건 없다는 믿음 때문인 듯하다. 상대가 하는 말도, 보여주는 행동도 지금 이 순간에만 유효한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왔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모든 것은 '도중'에 있다, 결정적 시작도 끝도 없다]는 문장을 보면서 두 손바닥을 마주치며 큰 소리로 박수를 쳤다. 내게는 사람이, 관계가 그렇다. 깊은 관계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만 유효한 말과 행동이 쌓여 모든 순간에 유효한 믿음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대도, 또 상대에게 내미는 나의 마음도 그렇다. 좀처럼 곁을 내어주지 않는 좁디좁은 품이지만, 한 번 품을 내어준 상대에게만큼은 무장해제되는 변덕스럽고 유치찬란한 마음이라니. 나도 내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좋아한다. 모든 우연의 순간에 놓인 사람들의 면면들을 사랑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애정하고 또 갈망하는 것이 있다. 바로 '눈빛'이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로부터 늘 들어왔다. 마흔 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말 말이다. 그만큼 살아온 세월이 쌓여 시나브로 녹아든 것이 그 사람의 얼굴이고 표정이라는 인생의 깨달음이 담긴 말이다. 그처럼 내게는 '눈빛'이 상대를 말해주는 좋은 수단이다. 누군가와 시간을 보낼 때면, 내가 작게 담겨 있는 그 사람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사람 안에 비친 나와, 나를 가득 담고 있는 그 사람의 눈길을 바라보며 영원처럼 흐르는 소리 없는 언어들을 보고 듣는다. 그런 나를 매우 잘 알았던 한 대학 선배는, 흩날리는 벚꽃나무 아래서 내게 대뜸 고백을 했던 그 날, 고백의 말을 갑자기 멈추고 자신의 큰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자신의 이 지난한 고백이 갑작스럽고 믿어지지 않는다면 나를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의 자기 눈을 보라고. 자기 눈빛으로 고백을 갈음하고 싶다고. 퍽 달콤하고 다정했던 그 선배와 나는 결국 벚꽃 같은 연애도 했었다.




남편과의 시작도 그랬다. 우리의 관계가 공식적인 이름을 붙이기에는 멀고, 남남이라기에는 조금 더 가까웠던 그 시절부터, 그러니까 소위 썸을 타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남편의 눈빛에 마음이 동하는 순간이 많았다. 그 언젠가의 선배처럼 영리하게 나를 공략한 눈빛이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눈빛에 유난히 약하다는 걸 몰랐을 텐데, 나와 마주한 남편의 눈빛에는 참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 처음은 우리 두 사람을 소개해 준 언니의 결혼식 날이었다. 어색하지만 용기 내어 함께 방문한 결혼식장에서 아름다운 신부 대신 내게 진하게 고정되어 있던 그 눈빛을 길이길이 기억한다. 아련하고도 뜨거웠던 그 눈빛은 어쩐지 몹시 슬프고도 유약했다. 매일같이 짧고 긴 데이트가 이어졌음에도 장난기만이 가득했던 그 눈이, 전혀 다른 색채로 나를 향해 있었다. 밝고 다정하기만 한 눈빛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감정가를 담은 언어였다. 때로는 한 순간의 눈빛이 백 마디 사랑한다는 말보다 강렬하다. 

결혼해 함께 산 지 7년. 늘 나만을 향했던 남편의 그 애잔하고 찬란한 눈빛은 이제 내가 아닌 아이를 향할 때가 더 많다. 처음에는 그것이 퍽 서운했는데, 지금은 그것을 보는 것이 좋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러 즐기기도 한다. 누군가를 마음 다해 사랑하는 그 조용한 언어를 바라보며, 내가 받았던 크나큰 마음을 되새긴다. 열에 아홉은 아이를 향했다가도, 이따금씩 짙게 나를 향해 돌아서는 그 하나의 순간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런 언어가 어디 눈빛뿐이랴. 소리 없이도 강렬하고도 깊게 전해지는 많은 마음들을 사랑한다. 강의 도중 나의 지나가는 말에 쉬이 흔들리는 눈빛에서 유년 시절의 아픔이나 용서를 읽고, 다음 사람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오랜 시간 버티고 서서 문을 잡고 기다리는 단단한 손길에 실린 배려를 읽고, 식당을 나서기 전 휴지 두 장을 뽑아 무심한 듯 곁의 사람에게 건네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에서 다정함을 읽고, 후미진 골목길을 걸을 때 상대가 가장자리에서 걷게 하는 신중하고 확신에 찬 걸음에서 보호의 마음을 읽는다. 

여전히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스치는 그 순간에만 유효한 말과 행동들을 믿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의 삶에 녹아든 찰나의 소리 없는 언어들을 사랑한다. 내게는 참 주는 것 없이 미운 그 어떤 사람도, 생에 어느 한 순간은 다정함이나 친절함이 녹아든 눈빛과 몸짓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므로, 그 언젠가 내게도 와닿을 조용하고도 묵직한 언어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을 떠난 그 어떤 사람도, 내 곁에 머무른 동안 한없이 흘려주었던 그 밝고 빛나는 눈빛과 몸짓을 되새기며,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에게 반짝이는 언어로 전해질 것을 소리 없이 약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대와 내가 주고받은 소리 없는 대화들을 떠올린다. 한순간에만 유효했던 그대와 내가 매 순간 유효한 사이가 되었음을 떠올리며 웃음 짓는다. 결국 내가 그간 사랑했던 소리 없는 언어들은, 내가 그대에게 마음을 실어 보내는 중요한 언어들이었음을 깨닫는다. 혹 내가 그대에게 못 미더운 존재로 느껴지는 그 어느 날에는, 함께하는 시간 동안 조용히 지나쳤을지도 모를 나의 언어들을 떠올려주기를 바라본다. 화려한 소리로 채워진 말보다, 소리 하나 없이 무겁게 전해지는 눈빛과 몸짓으로 마음을 전하는 나의 수줍은 언어를 상기해 주길 감히 기대해 본다. 오늘도 언어 없는 언어로 나의 마음을 전한다. 내가 몹시도 애정하는 모든 그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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