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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빛

첫 번째 교환독서: 마쓰이에 마사시, <가라앉는 프랜시스>

by 밤비


옥대장님께.


눅눅한 바람으로 젖어드는 가을밤입니다. 비가 오고 습한 날이면 끝간 데 없이 자꾸만 어디론가 가라앉는 걸 느낍니다. 저혈압을 핑계 삼아보지만 비단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몸은 더없이 축축하고 무겁지만 마음만은 보드랍고 보송보송한 밤. 조금 전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왔어도 마치 오랜만에 연락하듯 편지를 씁니다. 옥대장님의 오늘 밤은 어떤가요.


옥대장님과 함께 읽고 있는 <가라앉는 프랜시스>는 어느덧 중반을 넘었습니다. 퍽 매력적인 책이지요. 이처럼 선연하게 눈앞에 모든 풍경과 사람들이 그려지는 글을 제가 좋아한다고 말씀드린 적 있던가요. 한 번 붙잡기 시작하면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어 단숨에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합니다. 제가 읽고 있는 페이지에는 게이코와 카즈히코,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이 좀 더 짙게 뒤엉키고 있습니다. 뒷 이야기를 쉽사리 예상할 순 없지만 기대하며 차근차근 읽고 있어요.


사실 초반부를 읽는 내내 '사랑'보다는 '삶'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읽었습니다. 고즈넉한 안치나이 마을 이야기와 우체부의 생활상에 눈길이 오래 머무른 탓이지요. 그런 장면들을 읽는 내내 옥대장님을 자주 떠올렸어요. 왜일까, 어째서 그런 걸까 고심했는데 이 장면에서 그만 웃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배달중이신데. 갑작스럽지만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쉬시죠? 시간 있으세요? 에다루의 친구 부부가 놀러올건데 차 마시고, 음악 들을까 하고요. 자주 듣는 CD 한두 장 갖고 오셔서 들어보면 우리 집 재생 장치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 지 이해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오후라면 언제라도 좋습니다. 둘다 서른 조금 넘은 정도니까 당신하고 비슷한 나이대이고, 편안한 사람들입니다." 39p.



사실 이거 말고도 카즈히코가 게이코에게 몇 번이고 먼저 말을 걸고, 또 초대하는 장면이 반복돼요. 우편배달 업무 외엔 다른 사적인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고 고요하고 평온한 삶을 꾸려가던 게이코는 덜컥 그 온기에 응하고 말죠. 옥대장님은 오늘도 제게 그러셨어요. '시간 되면 저녁 먹구 가~' 그러면 저는 또 사양하지 않고 포로로 옥대장님께 날아갑니다.


옥대장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를 초대하고 환대해 주는 존재였어요. 진짜로요. 제일 처음은 우리 두 아이가 모두 어렸을 때였어요. 혹시 별 계획 없으면 도서관에 함께 가겠느냐는 말로 그 날의 저를 초대했지요. 그것만으로도 설렜던 제게 특유의 무해한 표정과 말투로 본인의 집까지 초대해 주셨었어요. 어차피 점심 때인데 간단히 밥이나 한 끼 먹고 가라고. 그 날 차분하고 정갈하게 한 끼 식사를 뚝딱 준비해 내놓는 옥대장님의 뒷모습을 저는 오래토록 소중히 간직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하게 되리라는 어떤 기대나 예상이 없었는데도 마냥 좋았거든요.


또 언젠가는 뷰가 탁 트인 카페로도 저를 초대했어요. 차 한 잔이나 함께 하자는 가벼운 인사로 말예요. 저는 속절없이 옥대장님의 초대가 너무 좋아 단숨에 그 카페로 출발했더랬지요. 옥대장님은 그 날을 상기하며 우리 두 사람의 결이 맞닿은 순간이라 말하곤 하는데요, 사실 저는 그 전부터 옥대장님이 좋았던 것 같아요. 게이코가 카즈히코에게 알 수 없이 끌렸던 것처럼, 살다 보면 이유 없이 자꾸만 좋은 사람 있지 않나요? 옥대장님이 제게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언제나 편히 저를 찾아주고, 얼굴 마주할 때마다 마음 다 해 환대해 주는 사람을 어찌 싫어할 수 있겠어요.


결정적인 초대는 독서회였지요. 육아우울의 깊은 늪에서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매던 날들 중에 한 줄기 빛 같은 부름이었어요. 그러니 대책 없이 곧장,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 기회를 덥석 잡았는지도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책과 인생을 함께 엮고 나누어 먹는 사이가 되기까지 그 날, 그 초대가 없었더라면 정말 가능했을까 그런 생각도 해요. (물론 ..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결국 만났을 거예요) 우리 사이엔 게이코와 카즈히코가 나눈 농밀한 정사 같은 건 없었지만 그보다 더 뜨겁고 진하고 생생한 마음들이 있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아요.



게이코는 생각한다. 사람이 형태로 만든 것은 남아도, 사람 그 자체는 남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고, 손과 발, 몸을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었는지 ……. 형태로 남지 않는 것은 다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한 방울도 같은 물이 포함되지 않았는데도, 같은 흐름으로만 보이는 강의 흐름과 비슷하다. 격류에 실려온 커다란 바위나 큰 나무줄기처럼, 거기에 멈춰 서서 형태를 남기는 것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좀처럼 흘러오지 않는다. 그렇게 친숙하고 친했던, 못 알아볼 리도, 잊을 리도 없는 몸짓과 목소리와 냄새는 망망한 시간 앞에서 여지없이 패배한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이윽고 잊히고 사라진다. 23p.



맞는 말일지도 몰라요. 모든 날의 옥대장님을 기억하지는 못 해요. 그치만 희미해지지도, 잊히고 사라지지도 않는 무언가는 분명 있어요. 그것이 제게는 '환대의 빛'입니다. 옥대장님이 언제든 저를 향해 내밀어주던 다정한 초대가, 한 조각의 마음이 제 기억 한 켠에 깊은 발자국으로 남아있지요. 그것은 언제고 들추어보고 어루만질 수 있는 저만의 소중한 보물이에요. 누구도 쉬이 퇴색시킬 수 없고, 그 무엇도 가볍게 범할 수 없지요.


쓰다 보니 어쩐지 사랑고백이 되어버렸네요. 그래도 괜찮지요, 가끔은 이렇게 무작정 고백해 버려도. 다음번엔 제가 옥대장님을, 그리고 어딘가의 또 다른 밤비를 먼저 초대해 보려고요. 조금 더 용기 내서, 제가 받았던 그 마음들을 흉내 내는 심정으로 한 뼘 더 먼저 다가가 보는 거예요. 혹, 지금 제가 세상을 향해 전보다 조금 더 밝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그건 모두 옥대장님이 제게 건넨 환대의 빛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어쩌다 마음이 춥고 외로운 날이면 저를 찾아주세요. 옥대장님이 선물해 준 환대의 빛이 제 안에 환히 빛나고 있으니까요. 옥대장님이 직접 밝혀준 삶의 온기입니다.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을 그 모든 빛과 온기의 생명들을 떠올려봐 주세요. 반딧불이처럼 무리 지어 빛으로 화답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귀뚜라미 소리가 크게 울리는 가을밤입니다. 오늘도 부디 평온한 밤이기를 바라요. 잘 자요.


밤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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