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교환독서 : 마쓰이에 마사시, <가라앉는 프랜시스>
호기롭게 켠 화면인데 깜빡이는 커서만 뚫어져라 보며 몇 분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네요. 불현듯 무슨 할 말이 공고해 그렇게도 호기로웠나, 와 정작 내가 하려는 말은 어떤 색깔의 단어들인가, 로 마음이 나뉘네요. ‘교환독서’라 하니 이 책의 내용이나 단상, 기껏해야 사유 정도를 주고받아야 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제가 밤비님과 주고받고 싶은 건 책이 아니라 서로의 계절이 아닐까 합니다.
가을이 왔음을 어떻게 아냐는 아이의 질문에 제가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왜’나 ‘언제’가 들어간 질문은 줄곳 받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가 들어가니 질문 자체가 하나의 철학적 사유 같은 거지요. 그 말에 제가 무어라 대답할지를 고민합니다. 저는 그런 고민의 과정과 시간이 퍽 중요한 사람인데요. 한참을 고민한 후 아이에게 말합니다. “어떻게든 알아.” 권여선 작가님의 ‘사슴벌레식 문답’을 오마주 했달까요? 가을도 계절도, 너도 나도 우린 ‘어떻게든’ 알게 되지요. 그 계절에서 밤비님과 걸어갈 ‘서로(書路)’의 길이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우연한 계기로 함께 읽게 된 책은 마쓰이에 마사시 작가의 <가라앉는 프랜시스>입니다. 제가 이야기했던가요? 20대 저는 일본 문학 덕후였다는. 남편은 애니를 동생은 음악을, 저는 문학을 동경했더랬죠. 지금도 혹여 일본 여행을 가게 된다면 도쿄 타워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에쿠니 가오리 <도쿄 타워>), 언제고 피렌체에 간다면 두오모 성당의 탑에 올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츠지 히토나리 <냉정과 열정사이>) 특히나 에쿠니 가오리 소설 <반짝반짝 빛나는>은 여전히 회자되는 꽤 진한 소설이고요. 그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와 시마다 마사히코, 야마모토 후미오 등 여러 현대 소설을 읽으며 청춘의 한 자락을 펄럭였습니다.
중년이 되어 다시금 만나는 일본 문학이 대부분 고전이다 보니 이전에 느꼈던 그런 아릿한 맛은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그 아릿한 풀내음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직 다 읽기 전이라 한 두 단어로 그것을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우체부’라는 게이코의 직업이 이미 저에게 지난날의 향수를 그러 모아 하나의 계절로 안겼습니다. 시나브로 사라졌던 것들이 부지불식간 날아들었지요.
사람이 형태로 만든 것은 남아도, 사람 그 자체는 남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고, 손과 발, 몸을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었는지... 형태로 남지 않는 것은 다 사라져 버린다. 23p
사라졌다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단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되살아났습니다, 제가 남긴 형태는 모호하고 또 때때로 다르게 해석되긴 하지만 결코 사라졌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무력하게 꽂혀만 있던 그 시절이 나의 눈길 한 번에, 기억 한 홉에, 멈춰진 1초에 온전히 살아났습니다.
이 오디오는 음악의 재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음을 재현하기 위해서 조립된 것이었다. 49p
이 책은 단순히 그 시절을 떠올리기 위해 펼쳐진 책이 아니라 그 계절과 시간을 재구성하기 위해 펼쳐진 책입니다. 그때는 제 곁에 없었던 밤비님을 그 시절로 초대해 다시 살아보고 싶네요. 저와 함께 그 시간으로, 계절로 함께 가 보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