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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Mar 25. 2024

단편소설: 감사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골목, 공연히 주변을 휘이- 한 번 돌아보고는 이내 깊은 숨을 내뱉었다. 낯선 감각. 분명 1년 넘게 오갔던 출퇴근길인데 요즘은 스치는 바람 냄새조차 낯설다. 서늘해진 어깨를 으쓱이고는 스르륵,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계절의 변화 같은 것이 아니었다. 몇 주 전부터 그녀 주변을 둘러싼 이 낯선 공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매 순간 낯선 무언가가 그녀가 옮기는 발자국마다 따라와 끈적하게 맺혀 있는 기분이었다.


몸무게는 2킬로그램이나 줄었다. 오늘은 회사에서 한 시간 빨리 퇴근했다. 병원에서는 신경성 위염이라고 했다. 당분간 커피와 녹차를 끊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라는 평범하고 흔한 조언이 쏟아졌다. 글쎄,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선.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다름 아닌 낯선 이의 시선이었다. 누군가의 눈길이 그녀를 끈질기게 따라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형용할 수 없는 찝찝하고 끈적한 눈동자. 끈적하고 서늘한 감각. 자신을 향해 번들거리고 있음이 분명한 정체 모를 눈동자는 좀처럼 그 실체를 찾을 수 없어 더 섬뜩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비슷한 불쾌한 느낌을 처음 느꼈던 건 초등학생 때였다. 2학년쯤이었을까. 하얀 두상이 보일 정도로 짧게 깎은 머리, 조금은 흐리멍덩한 눈동자, 어딘가 어색하고 아둔한 움직임. 같은 학교 4학년 남학생이었다. 오랜 머무름 끝에 그가 직접 실체를 드러낸 것은 급식소 뒷 길, 창고 근처에서였다. 무작정 뒷걸음질 치는 그녀를, 그는 더 빠른 걸음으로 따랐다. 그의 손에는 뿌리째 뽑힌 보라색 들꽃이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흡, 가쁜 숨을 들이켰다. 이내 스텝이 꼬인 그녀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손바닥에 닿은 아스팔트는 거칠었다. 남학생이 성큼,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왔다. 일그러진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던 그 남학생의 그림자는 몹시도 짙고 커다랬다.


"어. 그, 내, 내, 내가 도와줄까?"


말을 더듬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반사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지금 그녀가 도움을 청해야 할 곳은 그 남학생 쪽이 아니라 다른 쪽임을 단 번에 알아차렸다. 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작은 외마디 비명이 공기를 갈랐다. 급식소 주방 쪽에서 아주머니 몇 분이 다급하게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학생!"


빨간 양념이 잔뜩 묻은 고무장갑을 양손에 낀 채였다. 어른들의 등장에 당황한 남학생은 쥐고 있던 꽃을 떨어뜨리며 양손을 머리 위로 크게 휘두르듯 내저어 보였다. 보라색 꽃잎이 어울리지 않게 느릿느릿,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아, 아, 아니에요. 저는, 저, 저는 그냥...!"


담임 선생님의 보호를 받으며 부모님을 기다렸다. 특별반 남학생이라고 했다. 별 뜻은 없었다고. 정신 연령이 초등학교 1학년에도 채 못 미쳤던 그 남학생은 그저 보라색 들꽃을 선물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보라색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 남학생은, 매일 보라색 머리핀으로 반묶음 머리를 하고 다니던 그녀를 '순수하게' 좋아했다고. 그녀는 그날 이후, 집에 있던 보라색 물건을 몽땅 처분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그 남학생을 두 번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안정을 찾은 그녀는 급식소 뒤 편을 마주할 때면, 가끔 그 남학생을 떠올렸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겁을 먹었던 건 아닐까. 대화도 해 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비명부터 지른 자신 때문에 남학생이 곤란해지거나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남학생과 눈길이 마주쳤던 그날, 등 뒤로 서늘하게 타고 올라오던 그 끈적하고 불쾌한 느낌만은 선명하게 남아 그녀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생애 첫 스토커였다.


그 후 학창 시절, 그녀의 뒤를 쫓는 남학생들은 몇 더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뜨악하게 만들 정도의 끈적한 서늘함은 없었다. 몇 번의 고백과 몇 번의 거절이 오갈 뿐이었다. 자연스러운 접근과 거절이었고, 누구 하나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고 깔끔하게 단념했다.






터벅터벅, 건물 5층까지 오르는 걸음이 무거웠다. 자취 1년 차, 다음 번 집은 저층이거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조건부터 먼저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5층에 다다른 걸음이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계단 끝에서 멈췄다.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선 그녀는 자신의 눈에 밟히는 저 하얀 것이 무엇인지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아야 했다.


「최수련」 자신의 이름이 적힌 약 봉투였다.


약 봉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부터 다급히 찾았다. 건물 주인아주머니 전화번호를 찾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 울리는 아주머니의 음성에 다짜고짜 건물 cctv를 확인할 수 있느냐 물었다. 지금 당장 경찰서를 찾아가야 할까, 지나치게 과민 반응을 하는 걸까 고민하는 그 모든 찰나에도 끈적한 눈길은 그녀를 따라붙었다. 다시 또, 등 뒤가 서늘했다. 급식소 뒤 편, 흩날리던 보라색 꽃잎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보라색 꽃을 건네던 그 손길이 어딘가 모르게 순수한 끈적임이었다면, 저 하얀 약 봉투는 순수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훨씬 더 역겹고 더러운 끈적임이 분명했다. 어디서부터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간 우편함의 우편물이 중간에 사라지거나 흐트러져 있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아침에 급히 출근하면서 스캔하듯 본 우편함의 형태와 퇴근길에 마주한 우편함의 형태가 다른 날이 더 많았다. 게 중 몇은 뜯었다가 다시 붙인 흔적도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하루는 날짜에 맞춰 내놓은  일반 쓰레기 봉투의 모서리가 찢겨진 날도 있었다.  동네에 돌아다니는 도둑 고양이가 한 짓일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그녀가 썼던 메모나 영수증 몇이 증발하고 없었다. 수련은 자신이 망상장애라도 걸린 걸까,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저 하얀 약 봉투가 나타난 순간 모든 것이 자명해졌다. 몇 주간의 이 모든 정황들은 자신이 홀로 만들어낸 착각이 아니었다.  





잘근잘근,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데 건물 주인아주머니의 전화가 울렸다. 안타깝게도 cctv는 건물 입구에 세워진  1 대가 전부였다. 몹시 흐리고 옅은 화질도 화질이거니와 cctv 영상만으로는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각 층마다 3세대씩, 5층짜리 건물. 총 15 세대가 함께 사는 건물에는 반나절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건물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그들을 방문한 지인들, 하루에 몇 번이고 오가는 배달 라이더까지. 영상만으로는 흰 약 봉투의 흔적도, 의심스러운 누군가도 시원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수련의 연락에 진아가 다급히 달려왔다. 급한 대로 옷가지만 챙겨 당분간 자신의 집으로 가 있자는 진아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수련은 고집을 피웠다. 도망쳐야 할 것은, 사라져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 스토커라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단지 머무는 장소를 옮긴다고 해서 이 끈적한 눈길이 사라질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누구보다 수련의 성격을 잘 아는 진아였다. 대신 진아가 수련의 집에 자주 드나들기로 했다. 진아는 태어난 지 13개월 된 딸아이의 엄마였다. 집을 오래 비울 수 없었다.


수련은 경찰에 신고부터 했다. 그간 자신이 느낀 불쾌한 시선과 우편함, 쓰레기 봉투 사건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야 했다. 끝으로 오늘 현관 앞에 놓인 약 봉투를 증거로 내밀었다. 상대는 점점 대범해지고 있었다. 보다 직접적인 물증을 찾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련은 현관문에 인터넷으로 구매한 cctv를 설치했다. 경찰은 주변 순찰을 강화하겠다고 했고, 원하면 출퇴근길에 동행해 주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그날처럼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보처럼 넘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자신이 직접 맞설 거라고, 그럴 수 있다고 되뇌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였다.


"502호, 맞죠? 자연스럽게 계속 걸어요. 뒤쪽 10시 방향."


낯선 향기가 곁에 붙었다. 수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으나 이내 허리를 곧게 펴고 태연한 척 앞을 보고 걸었다. 익숙한 얼굴, 501호였다. 자기 건물에 당최 스토커가 웬 말이냐고 주인아주머니가 하루종일 소란스럽게 한 터였다. 모든 세대를 하나하나 방문하며 502호에 이상한 사람 보이면 바로 신고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사람들을 들볶았다. 501호도 그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울 리 없었다. 501호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춰 걸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으려 했으나, 자꾸만 다리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얕아 보이지만 실은 매우 위험한 늪에 발이 빠진 것만 같았다. 허우적거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야!! 왜!!!! 내가 더러워? 내가 뭐 했는데! 뭘 잘못했는데!!" 


수련의 신고 문자를 받은 경찰이 곧장 출동했다. 이내 진아도 아기 띠를 한 채 수련의 집으로 뛰어왔다. 현장 검거. 그림자처럼 뒤를 따라다니는 생활이 지겨웠던 걸까. 지하철에서부터 집까지, 퇴근하는 수련을 끈질기게 쫓는 그의 등 뒤에는 파란 수국 꽃다발이 찰랑찰랑,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 전 새로 생긴 편의점의 야간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수련의 기억이 맞다면 자신과 눈길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던 사람이었다. 물건을 계산할 때마다 묘하게 사람을 불편하게 했던 그 남자. 경찰서로 연행되는 순간에도 그는 수련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바닥에 내팽겨진 파란 수국 꽃다발이 그의 거친 발길에 짓밟혀 으스러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편의점에 들렀던 수련이 습관처럼 건넨 인사와 눈웃음이 발단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망연자실했다. 자신에게서 출발한 친절은 그 언젠가 지구를 돌고 돌아 친절로, 아니, 친절이 아니어도 좋으니 어떤 식으로든 따뜻한 무언가로 되돌아올 거라 믿고 살았다. 그런데 자신의 사소한 감사 인사가 커다란 공포가 되어 돌아왔다. 범인은 수련과 같은 건물, 2층에 살고 있었다. 청소년 시절의 범행이긴 했지만 2건의 성추행 미수와 1건의 성폭력 전과가 있었다. 최근 5년 간 정신과 약물 복용 이력이 있었고, 현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치료를 받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몇 주 간, 그녀를 괴롭혔던 끈적하고 서늘한 시선에 비해 실상은 어리숙하고 치밀하지 못한 편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수련의 현관 cctv에도 흔적을 남겨 두었다. 새벽 4시, 검은 모자를 눌러쓴 채 한참 동안 수련의 현관 앞 복도를 서성거리며 기웃거리는 모습도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범인이 검거된 날 밤, 진아는 남편에게 아이를 부탁한 채 수련의 집에서 함께 잤다. 다음 날, 진아를 등 떠밀어 집으로 돌려보낸 수련은 회사에 일주일 간 휴가를 냈다. 전 날 밤의 소동이 하룻밤 꿈만 같았다. 온몸 구석구석 묻어있는 그 끈적하고 더러운 눈길을 떨쳐내고 싶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샤워를 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대청소까지 끝낸 수련은 쓰레기를 버리러 집을 나서는 길, 건물 복도에서 501호와 마주쳤다. 어제 내내 자신의 발걸음을 맞추어 걸어주었던 고마운 그 남자. 


"안녕하세요." 

"어, 502호 맞죠? 괜찮으세요?"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아니에요. 주인 이모님이 좀 유별나야죠."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게 웃는 그를 향해 수련도 덩달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짧은 동행, 대단한 일을 함께 해 낸 전우애 같은 것이라도 생긴 걸까. 두 사람은 함께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여는 그 카페는 브런치가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는 주변 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원생이라고 했다. 이른 새벽이나 늦은 시간에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가끔 들었던 터였다. 야근이 잦은 직장인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렸다. 학생이었구나.


"어제 너무 감사해서요. 오늘은 제가 대접할게요."

"아, 별일 없어 다행이에요. 감사하다는 인사가 뭐 특별하다고 그랬을까요, 그 사람은."






순간 지이이잉, 진동벨이 울렸다. 울림은 생각보다 컸다. 순간, 테이블 전체가 흔들렸다. 아니, 수련은 자신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나 메뉴를 픽업하러 걸어가는 내내 수련의 등 뒤에 내리꽂히고 있을 그 사람의 시선이 몹시도 뜨거웠다. 아니, 익숙한 눈길이었다. 사람 좋게 웃어 보이던 그 눈웃음 뒤로, 끈적하고 서늘한 시선이 꽁꽁 숨어 있었다.


[감사하다고 했잖아! 네가! 네가 먼저 나한테 웃어줬잖아!!]


경찰서 유치장 쇠창살 사이로 손을 뻗으며 스토커가 발악하듯 내질렀던 그 말. 그 미친놈의 외침을 들은 건 분명 수련 자신과 진아뿐이었다. 다시, 발걸음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휘청이는 다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써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걸었다. 손 끝이 저렸다. 어젯밤 빠져나온 줄 알았던 그 깊고 위험한 늪에서 정작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지러웠다. 숨이 가빴다. 이름 모를 보라색 들꽃의 꽃잎이, 푸른 수국 꽃다발이 눈앞에서 뒤엉켜 쏟아져 내렸다.


끈적한 서늘함. 샤워를 해도, 대청소를 해도 끈질기게 남아있던 그 더러운 흔적의 주인이 지금, 바로 자신의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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