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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Mar 22. 2024

단편소설: 식물




어릴 때부터 동물이라면 다 좋았다. 특별히 종류를 가리지 않고 전부 다. 귀여운 반려동물들에만 국한된 사랑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였을 텐데, 그 시절 우리 가족이 살던 오래된 주택은 나무로 지어진 집이었다. 어느 날, 방 한 구석에서 구멍을 발견했다. 침대 머리맡 아래쪽이라, 떨어진 물건을 찾기 위해 침대를 당기지 않았더라면 보지 못했을 구멍이었다. 아빠는 급한대로 합판과 실리콘으로 구멍을 메웠다. 그 때부터였다. 깊은 잠에 빠진 새벽이면 머리맡에서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륵그르륵, 가르륵가륵가륵.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조차 몰랐다. 이틀 쯤 지나고야 알았다. 사실 그 구멍은 쥐가 만든 통로였고, 하필 그 안에 쥐가 들어가 있는 사이 아빠가 구멍을 메웠던 터라 꼼짝없이 갇힌 쥐가 밖으로 나오려고 다시 구멍을 파는 소리였다. 아빠는 채웠던 구멍을 다시 뚫었다. 구멍 앞에는 커다란 끈끈이 쥐덫이 놓여 있었다. 


다음 날, 쥐덫에는 회색 쥐가 붙어 있었다. 나는 발록발록한 작은 귀, 동그랗고 새-카만 눈동자를 보고 한 눈에 반했다. 햄스터 같은 반려 설치류들과는 전혀 다른 귀여움이었다. 서동쥐전을 읽으며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의 회색 쥐였다. 하수구를 전전했을 지,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이 일상이었을지 모를 뻣뻣하고 지저분한 털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둥그렇게 말린 긴 꼬리를 만져보고 싶었고, 작디 작은 뒷통수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그걸 허락해 줄 부모님이 아니었다. 아쉬움에 울상이 된 나를 두고, 아빠는 쥐덫을 반으로 접어 내게서 멀어졌다. 쥐덫을 들지 않은 아빠의 다른 손에는 망치가 들려 있었다. 그 날 밤, 나는 남몰래 숨죽여 울었다. 새벽이면 다시 나무 긁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내 방에 잠시 같이 살았던 그 쥐를, 나는 꽤 오래토록 그리워했다. 이상한 애착이었다. 동물에 대한 내 애정은 이처럼 한계가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세팅된 채로 태어난 것 같았다. 그저 동물이라면 이유불문 모두 반갑고 사랑스러웠다. 이정도 마음이면 동물과 함께 하는 직업을 택했어도 직업 만족도가 꽤 높았을 듯 싶다. 




그런데 식물은, 달랐다.     




식물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생명체로 바라보았기에 몹시도 애정했지만, 식물 입장에서 나는 몹시도 악질적인 연쇄살인마였다. 이상하게 내가 키우는 화분은 기다렸다는 듯 차례로 죽어나갔다. 식물을 키운 장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가 키우는 화분들은 보란듯이 잘 자랐다. 생기까지 돌았다. 늘 자리를 떠나는 것은 그 곁에 있던 내 화분들이었다. 이유도 다양했다. 어떤 것은 물은 너무 많이 줘서, 어떤 것은 물을 너무 적게 줘서, 어떤 것은 진드기에 점령 당해서, 또 어떤 것은 이유도 모른 채로 ... 갖은 애를 써도 결과는 같았다. 엄마의 돌봄을 따라해 보기도 했고, 좋다는 영양제를 사다 꽂아줘 보기도 했고,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같이 들려주기도 했다. 소용 없었다. 내 품으로 들어온 식물들은 하나같이 시름시름 앓다가 이내 매말라 죽었다. 그런 일들이 거듭되자 나는 식물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 잠정 결론을 내렸더랬다. 차츰, 내 삶에서 '식물'은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운 좋게 식물들을 잘 길러냈던 적도 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햇살이 참 좋았던 H와 나, 우리의 첫 집. 그 곳에서는 내가 무언가 하지 않아도 다육이들이 잘 자라 주었다. 한 달에 한 번쯤 물을 주었을까, 다육이들은 지나치게 물을 적게 주어도 괜찮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코니 화단은 다육이들로 가득 찼다. 어쩌면, 식물과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엿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나는 화단을 포기해야 했다. 이사를 결정한 집은 거실을 확장해서 발코니가 없었다. 작은 크기의 발코니가 있긴 했지만 실외기가 안으로 들어와 있어 식물을 키울 수 없는 환경이었다. 식물 없는 삶이 이어졌다. 기분을 내 보려 가끔 생화를 한 묶음씩 사서 화병에 꽂아두곤 했지만, 며칠 가지 않아 시들기 일쑤였다. 결국, 식물에 대한 나의 희망은 그 집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한낱 꿈이었을까. 다시 또 식물과 죽음 사이의 연결선이 짙어졌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죽음은 그저 죽음인 채로 곁에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 편안하거나 익숙한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어릴 때는 막연히 죽음을 무서워하고, 걱정하고,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인간이었다. 변화의 출발점을 찾다가 내가 만났던 죽음들을 떠올렸다. 끝없이 죽음만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시절 죽음을 끝내 포기한 덕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겠지만, 여하튼 죽음 속에 갇힌 듯 살았던 그 시간 덕에 나는 죽음과 제법 친밀해졌다. 일반적으로 '죽음'하면 떠올리는 두려움이나 불안, 슬픔, 외로움 같은 감정들과 뒤엉킨 어둠이 내게는 없다. 졸업이나 취직, 결혼처럼 그저 삶에서 겪는 경험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러 번 경험해 볼 수 없고, 결코 되돌릴 수 없고, 경험하는 순간 삶이 끝나 버린다는 점에서는 다른 경험들과는 차원이 다를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내게 죽음은 무겁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매 순간 살아가고 있지만, 매 순간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죽음을 일상처럼 마주하다보니 자연스레 오늘같은 날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나의 존엄성과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고민이었다. 현실은 상상보다 더 지독하다. H의 도움 없이 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그 어떤 식물도, 동물도 애정으로 키워본 적 없는 H가, 그런 일은 자기랑 맞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H가 나를 돌본다. 남몰래 울고 또 울었을 젖은 얼굴. 슬픈 표정을 삼키고는 다정하게 말을 붙이며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내 몸을 옆으로 기울인다. 욕창이 생기지 않으려면 몸을 계속 움직여줘야 한다. 


너는 알까. 나는 너의 따스한 손길조차 느낄 수 없어. 내 몸에 닿는 네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게 못내 서러워.


식물을 키울 때는 내가 매번 식물을 시들어 죽게 했는데 내가 식물인간이 된 지금은 오히려 H, 네가 먼저 시들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결국 나 때문에 시들어 죽는다니, 전자도 후자도 별로 마음에 썩 들지 않는 모양새다. 나는 오늘로 한 달 째, 식물처럼 살아있다. 의식이 없고 전신이 경직된 채로 대사(代謝)라는 식물적 기능만을 하는 인간. 죽음과 긴밀히 맞닿아 있지만, 기적처럼 다시 되살아날 수도 있는 인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인간. 식물상태의 인간. 글쎄. 약속된 기한 없는 지루한 기다림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랑이라는 이유로 너에게 모두 짊어지게 해도 되는 걸까. 1%의 가능성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는 씨름을 하는 게 맞는걸까.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데. 매일같이 젖어있는 네 얼굴이 더 아픈데. 나의 삶과 죽음을 내가 직접 결정할 수만 있다면, 나의 그 결정을 네게 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한다면 너는, 나의 결정을 받아들여 줄까.    




오늘따라 유난히, 한 손에는 쥐 덫과 다른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멀어지던 아빠의 뒷모습이 그립다. 

내게도 한 번에 망치를 휘둘러줄 커다란 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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