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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Apr 16. 2024

에세이: 순간과 영원

'순간'으로 남는 단편적인 사진, '영원히' 지속되는 기억



바람결에 휘날리며 자유로이 헝클어진 털이 꼭 아이스크림 같다고 생각했다. 갖가지 명암의 흰색과 베이지색이 뒤엉킨 구구 크러스터. 그래, 꼭 그 아이스크림 같다.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 괜히 더위라도 먹을까 걱정되어 짧게 정리했던 털을 다시 길게 기르는 중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거지 존에 도달한 셈. 그럼에도 콧잔등 위로 듬성듬성 자란 털 사이, 크고 동그란 눈망울이 검은 몽돌처럼 매끈하게 반짝이며 정확히 카메라를 바라본다. 분홍 소시지 같은 얇고 넓적한 혓바닥을 내밀고. 할딱 거리는 밭은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습기 가득했던 초 가을. 물기 머금은 머리카락 끝이 구불구불 원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분명 그날 아침부터 고데기로 고집 센 곱슬머리를 달래가며 열심히 폈겠지만 소용없다). 흰색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스무 살의 내가 반지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배시시 웃는다. 내 허벅지 위에서 마저 정돈되지 않은 숨을 할딱이며 고르는 중인 네가 내 품에 폭 안긴 듯, 철퍼덕 기댄 듯 늘어지게 엎드려 있다.



배경보다는 오로지 인물 위주로 찍은 한 장의 사진 속 찰나의 너와 나. 그럼에도 분명히 기억한다. 그 날의 온도와 날씨, 장소, 또 그 카메라 셔터를 누른 손가락의 주인과 그 주인 너머로 흐뭇하게 웃음을 흘리던 다른 이들까지도. 네모난 종이 한 장에 담긴 어느 순간 속에 너무도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평소에는 좀처럼 쉬이 떠올리며 살지 않았던, 그러나 머릿속 어딘가에 영원히 기록되어 있다가 이런 순간에 불쑥 열리면 그 날로 되돌아가 모든 것을 만끽한다.



국립 영천 호국원. 할아버지가 영원히 잠들어 계신 그곳에서 남긴 사진 한 장. 조금 뚱뚱하고 귀여웠던 젊은 날의 반지(10년 뒤 무지개다리 너머로 떠났다.). 철없고 우울했던 스무 살의 나(무엇이 그리도 암울했던가.). 언제나 먹거리에 진심이었던 엄마(그 날도 먹을 걸 많이 싸 갔었다.). 회사 택시 운전을 했던 베스트 드라이버 아빠(그 택시로 그 날 다 같이 움직였다.). 아주 건강하고 정신이 맑았던 할머니(지금은 몸이 편찮으시고 많은 기억을 잃으셨다.). 더 이상 할아버지가 그립다고 눈물짓기보다는 먼 곳에 사는 그리운 이 만나러 떠나듯 훌쩍, 소풍처럼 나섰던 여행길. 식구 넷이서 단출하고 오붓하고 또 설레기까지 했던 그 날. 그 모든 시간의 물결 속에 남겨진 사진 한 장. 영원히 기록된 순간. 



행복한 순간마다 의식하듯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남긴다. 전후 사정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어느 단편적인 조각까지도 수집하듯 기록한다. 그 언젠가 많이 지치고 힘든 날의 나에게 영원한 행복 한 알을 보내는 마음으로. 그 언젠가 지금을 잊고 살 내가 불현듯 만끽할 기억을 저축하는 마음으로. 꽃잎 하나, 열매 하나, 하늘 하나, 웃음 하나, 발가락 하나 놓치지 않고 사진에 남긴다. 짧은 순간을 영원하게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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