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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죽음 Apr 11. 2024

죽음이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은 슬프기만 한 것일까?

죽음이 존재한다는 당연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몸과 마음으로 염두에 두면서 살고 있지 못했다. 

아침에 깨어나면 일상은 시작되어야 했고 늘 다음 일을 미리 염려하거나 준비하는 탓으로 죽음은 대개 관심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죽음이라는 순수한 영혼은 잠시 잠깐 고개를 들어 자신이 존재함을 알려주기도 한다.      


 마음이 불안할 때면 어김없이 쫓기거나 여러 사람들 틈에서 우스운 사람이 되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꿈을 꾸는데 그러한 꿈들은 보통 아침이면 잊힌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꿈을 꾸었다.  

“괜찮아. 나중에 보자” 

평온하게 미소 짓는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꿈속의 나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거울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 할지 조금의 힌트라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꿈속의 내가 어떻게 슬픔을 감당하며 살아가게 되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고 꿈 밖의 나는 슬픔으로 마음이 무거워진 채 효심이 지극하지 못한 나를 탓했다.


 반면, 아들이 꿈을 꾼 적도 있다. 잠에서 깨어난 아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오길래 말했다. 

“왜, 꿈에서 엄마가 죽었어? ”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만 흘렸다. 

어린 아들을 두고 죽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들의 꿈속에서 내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꿈 밖의 나는 나의 죽음으로 남겨질 아들로 인해 슬펐다. 


죽음은 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일까?      


 2022년과 2023년 두 해 동안 두 번의 코로나와 두 번의 독감을 알았다. 몸이 아프면 모든 일상이 엉망이 된다. 일어나서 앉는 일, 내 발로 걸어 다니며 몸을 씻는 일, 빨래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을 누릴 수 없게 되면 마음에 오로지 하나의 소원이 생기게 된다. 

‘다시 건강하게 해 주세요’. 

 그러다 몸이 회복하면 보통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아이들의 전화를 반갑게 받고, 집안일도 웃으며 할 수 있다. 아픔의 시간 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하는 일인지 알게 된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당연한 일들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자연스러운 죽음 앞에는 짧든 길든 늘 병에 걸리는 기간이 있다. 얼마 전 노년의 건강한 삶을 연구한 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뇨병, 치매, 암, 심혈관 질환 등 이 네 가지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말했다. 

모든 이들이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 앞에 마음이 무력해졌다. 그럼에도 일상이 엉망이 되었던 아픔을 떠올리면 죽음 앞에 질병이 놓인다는 것은 어쩌면 삶에 감사함을 느끼라는 죽음의 배려는 아닐까?      

 

 나와 너의 죽음이 덜 슬펐으면 좋겠고, 죽음을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진실된 삶을 살고 싶은데 여전히 죽음에 대한 느낌은 선명하지 않았다. 그러다 책을 만났다. 

 1961년 스웨덴에서 태어나 다국적 기업에서 젊은 날 임원까지 한 나티코는 불현듯 태국 밀림 숲 속의 승려가 되어 17년을 보냈다. 돈을 만지지도 않고 불자들의 시주를 통해 하루 한 끼의 식사를 먹으며 오로지 수양을 위해 정진하는 그의 삶은 참 명료하고 진실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은 아름다웠다. 루게릭병을 진단받고 몸의 기능을 서서히 잃어가며 삶의 끝을 마주한 그는 말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어지는 음료를 한 잔 마시고, 조용히, 평화롭게 잠들었습니다. 이제 저는 축복받은 자의 기쁨을 느끼며 어떤 예측도 불허하는 모험을 떠납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걱정도 의심도 없이.”      


 죽음만이 삶을 완전하게 만든다. 생애 동안 꼭 쥐고 살지 말고 조금은 느슨하게 손을 펴고 살라고 말한 나티코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마법 같은 말을 남겨주었다. 

 나티코처럼 삶의 마지막을 두려움 없이 온전한 기쁨으로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알고 살아가라는 그의 말을 떠올리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리고 용기가 생겼다. 틀릴 수 있음을 아는 이는 어떤 일이든 도전해도 괜찮음을 알고 있을 테니.      


 15년간 1500마리의 고양이를 구조한 ‘나비야 사랑해’ 고양이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는 유주연 대표는 그동안 수많은 죽음을 목도했다. 버려진 고양이, 다친 고양이, 장애를 갖고 있는 고양이 등 외로움과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다 죽게 된 수많은 고양이들을 보며 그녀가 바라는 한 가지는 그저 녀석들이 자신이 쳐놓은 작은 울타리를 통해 잠깐이라도 쉬어가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 일이라고 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고 말했다. 이름 모를 고양이들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이젠 괜찮아. 다 잘될 거야.’라는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고양이들의 죽음은 차갑지만은 않겠지.    

  

 죽음을 진실하게 마주하고 있는 이들은 이렇게나 용감하고 따뜻하다. 그러니 이제 죽음을 생각할 때 나는 꿈을 떠올릴 것이고, 감사를 하게 될 것이고, 숲 속 승려와 고양이들을 떠올리며 ‘괜찮다’라는 마음이 들게 되었다. 한 달 전 브런치스토리의 작가명을 괜찮은 죽음이라고 지었는데 우연치고는 인연 같다. 

죽음과의 인연. 인생의 의미는 당신의 선물을 찾아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 나티코처럼 죽음이 알려주고 싶은 지혜를 찾으며 오늘을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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