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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연 Jan 10. 2024

저출산이 왜 문제인가

저출산은 문화적 현상

최근 한국을 2024년 가장 흥미로운 여행지로 꼽은 영국 더타임스의 글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비무장지대, 안동 하회마을, 부산 자갈치 시장, 찜질방, 노래방, 북촌, 길거리 음식, 저렴하고 편리한 대중교통, 백화점, 동대문 시장, 안전한 밤길, 고속도로 휴게소 등 이유도 다양하다. 먹고 놀기 좋은 한국. 한국의 자연과 문화가 세계무대에서 인정받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 본 한국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 2017년 그나마 1.0 이상을 유지하던 합계출산율이 올해 역사적 저점인 0.7을 기록했다. 한국은 놀기 좋지만 살아 내기는 어려운 곳일까. 과거 북유럽을 포함한 선진국들 역시 같은 문제를 겪은 바 있으나 한국은 그 도가 조금 지나치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저출생에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가치관이 투영되어 있다. 2021년 퓨리서치(Pew Research)에서 17개 선진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서베이(“What makes life meaningful?”)에서 ‘물질적 풍요’를 1위로 꼽은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건강’과 ‘사회’가 각각 1위에 올랐던 스페인과 대만을 제외한 나머지 14개 국가에서 단연 1위를 차지한 것은 ‘가족’이었다. 체계적 의료복지와 올리브유 위주의 식습관으로 2019년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국가로 선정된 스페인과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주장하는 중국의 위협을 항시 머리 위에 이고 살아가야 하는 대만의 정서는 나름 이해가 간다. 유교적 전통과 가족중심주의가 아직 강하게 남아있는 한국인이 ‘돈’을 1순위로 뽑았다니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전체론적(holistic) 성향이 강한 한국문화에서 개인은 전체의 일부로, 관계적 맥락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때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의 선후배로, 상사로, 스승으로, 배우자로, 자식으로, 부모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각 관계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며 존재감을 찾는다. 우리가 이름 아닌 지인의 역할을 호칭으로 사용하는 것, 처음 만나는 타인과의 대화를 어색해하는 것,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보다 그의 태도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 관계를 떠나 자신을 정의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 모두 이러한 문화적 전통을 반영한다. 유교의 오륜(五倫)을 통해 우리는 특정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열심히 학습했지만, 사회적 틀을 떠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많지 않다. 

개인의 정체성이 관계에 기반하고 있음은 자연히 그 관계를 특정 지어주는 상다방에 대한 절대적 의지를 뜻한다. 자식 없는 부모나 학생 없는 스승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존재는 해당 관계 내에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상대방이 있을 때에만 그 의미가 발생한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너도 있다’와 같은, 자신의 정체성을 상대방의 존재에 의지하는 정서는 전체론적 문화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한자로 인간을 표기할 때, 사이간(間) 자를 쓰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한국인의 머리와 가슴속에 가족은 자신과 분리하기 어려울 만큼 큰 의미를 가진 관계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돈이 가족보다 더 의미 있는 것으로 꼽힌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한국사회에서 관계는 곧 돈이기 때문이다. ‘역할’이라는 단어를 ‘구실’, ‘노릇’과 같은 일상의 언어로 치환해 보면 이 둘 간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조금 쉬워진다. 굳이 ‘체면 유지비’와 같은 노골적인 단어가 아니더라도, ‘부모 노릇’, ‘자식 노릇’, 혹은 ‘사람 구실’과 같은 표현에는 왠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돈’ 냄새가 올라온다. 과거 대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지내던 당시에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아들, 딸로서, 혹은 며느리, 사위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핵가족을 지나 1인 가구가 흔해진 오늘날, 역할극은 돈봉투와 계좌이체로 대체되고 있으며, 액수가 정체성을 뚜렷이 대변해 준다. 독자들도 가끔 자신이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자신이 괜찮은 아들딸인지 자문하며 괜히 부모님께 돈을 부쳐드린 적이 있을 것이다. 내심 형이나 동생보다 더 많이 드렸기를 바라며. ‘물질적 풍요’를 삶에 의미를 주는 요소 1위로 꼽은 한국인에게 그 돈을 도대체 어디에 쓰려느냐 묻지 않았던 퓨리서치가 조금 야박하게 느껴진다.


자녀를 낳고 기르는 문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이는 부모의 자아와 더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풍요’는 더 크고 절실해진다. 자신의 정체성은 부모라는 이름의 특이점으로 수렴하고 다른 자아와 역할들은 과감히 포기되거나 ‘부모’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우리처럼 가족중심주의가 강하면서도 여전히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자녀 역시 독립된 객체로 인식하는 서양의 부모와는 심적 부담의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물질적 풍요’는 엄마의 커리어 포기나 경력 단절 등 출산과 함께 더 멀어질 것이 뻔하다. ‘부모노릇’을 (주로 주위 타인들과 비교해) 잘 해내지 못할 것 같다면 아예 깔끔하게 포기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일단 낳기만 하면 알아서 잘 큰다’, 그러니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낳아라’는 주위 어른들의 충고에 못 이겨 출산을 결심하던 과거에 비해 확실히 준비성 하나는 뛰어난 요즘 세대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사회의 저출산은 다른 선진국들이 경험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문화적 특성상 그 강도가 다소 높고, 원체 낮은 인종 다양성 때문에 이를 위기로 인식하는 경향이 조금 과할 뿐이다. 문화를 정의하는 다양한 이론적 접근법이 있지만, 이들은 공히 수(數)와 기능을 고려하는 특징이 있다. 어떤 행동방식이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를 추종하는 구성원의 수가 일정 수준을 초과해야 하며, 또 그리함으로써 개인의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저출산은 변화하는 산업구조에 적응하기 위해 자연발생한,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이 가미된 인류 보편의 문화현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이를 ‘한국의 소멸’로 겁을 주어가며 천문학적 규모의 세금을 들여가며 대응해야 하는 일인지 의아하게 느껴진다. 물론 정책으로 문화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익에 부합할 때 그렇다. 필자의 유년시절 당시 인구급증과 함께 이미 1789년 출판되었던 맬서스의 인구론이 다시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와 같은 캠페인이 유행이었다.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60년대 6.0이던 합계출산율은 80년대 후반까지 1.57로 급감했다. 농경사회에서 2차 산업으로 순연하며 적은 인구로도 생산성이 혁신적으로 증가하고, 드디어 대가족 중심의 사회질서를 넘어 핵가족과 개인이 무대의 중심에 오르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떠올려보면, 개인에게 저출산은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굳이 정부주도의 캠페인이 필요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출산과 육아를 정부가 책임질 터이니 이제 더 낳으란다. 커리어를 통해 경제적 안정과 자신감, 자아를 경험한 젊은이들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 그런 선택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현재 정부의 정책은 ‘경제성장률 1%대 진입’과 ‘개인화(individuation)’라는 거대한 경제, 문화적 시류를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수 조원의 세금을 퍼부었음에도 정책적 실패를 반복한 이유이며 그 기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 늪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게다. 관계는 돈. 부담과 책임이 빠진 관계는 결코 의미 있는 것일 수 없다. 세금으로 정부가 정성스레 길러준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일까. 복지로 한국의 소멸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필시 가족의 해체를 수반한다. 출산은 어렵사리 한 인간을 온전히 길러내어 사회로 내보내는 것에 진정한 삶의 가치를 느끼는 개인의 선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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