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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연 Jan 25. 2023

집으로 가는 길

일상다반사: 처제와 나

때는 아마 2018년도 겨울이었던 것 같다.

당시 미국에 살고 있었는데 

11월 즈음 볼 일이 있어 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에게는 6살 어린 처체가 하나 있는데

처제가 인천에 사는지라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면 고맙게도 항상 마중을 나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오후 3시 즈음 2 터미널에 도착했다

역시 한국의 공기가 좋다.

뭔가 도시적인 냄새도 나고,

일단 내가 영어가 서툰 외국인이 아니라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이라는 것에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약 20-30분가량을 기다려

여행 가방 두 개를 찾았다.

말이 좋아 여행 가방이지

가볍고 최대한 짐을 많이 담을 수 있는

이제는 정말 버리고 싶은 이민가방.

한번 써 본 독자들은 '이민가방'이 담고 있는

애환, 고생, 사연 등등 많은 의미들에 

공감하리라 믿는다.


두 개의 이민가방에 담긴 것은

처가와 처제에게 전달할 미제 생활 용품.

가정용품에 익숙지 않은 나에게는

'굳이 이런 것까지 미국서 사 보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시시콜콜한 물건들이

가방 안에서 터질 듯 몸을 부풀리며 

늙어가는 나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곧 처제와 연락이 되었다.

당시 벌이가 변변치 않아

로밍은 할 생각도 못 했고

일단 공항 와이파이로 카톡만 터지면

그다음부터는 처제에게 모든 걸 맡기던 때였다.

물론 지금도 크게 사정이 나아지진 않았다.


"형부, 잘 도착하셨어요? 

지금 1 터미널 주차장이에요. 곧 봬요."

"어.. 처제... 지금 2 터미널에 내렸는데..."

"앗. 죄송해요. 급하게 오느라 확인을 못했네요.

그런데 제가 지금 이미 주차를 한 상태라

차를 다시 옮기느니

형부가 셔틀 타고 2 터미널로 오시면 어떨까요."


내가 원래 성격이 사교적이거나

이해를 잘하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공항 픽업까지 나온 처제에게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어, 그래. 금방 갈게."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이민가방 2개와

기내용 가방 하나, 그리고 백팩을 메고

난 셔틀에 올랐다.

셔틀에 올라탈 때 이민가방을

한 번에 하나씩 최대한 빨리 옮기면서

숨이 거칠어진다.

하지만 한국 아닌가.

조금 있으면 대학동창 친구들과 만나

삼겹살에 소주도 한 잔 할 테고,

뭐 이 정도야...


셔틀버스는 생각보다 오래 달렸다.

아마 20분 이상은 온 것 같다.

열세 시간 이코노미 비행에 이미

몸 구석구석이 저릿저릿해왔지만

여러 생각으로 기분은 좋다.

아. 한국 냄새.


"형부. 미안해요.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요.

여기 '아아'요."

역시 처제의 센스.

처제는 뭐랄까 영업이나 마케팅에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다.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어.. 뭐 이게 대수라고.

바쁜데 마중 나온 처제한테

내가 더 미안하지."

보셨죠? 커피 한 잔과 웃는 낯으로 

한방에 전세 역전.

속 좁은 나는 항상 이렇게 너무나 쉽게

다시 6살 아래 처제의 손바닥 위.


"형부 가방은 여기 실으시고요...

여기서 서울시내 들어가신다고 하셨죠?"

"어... OO에서 친구들 만나기로 해서..."

"잠깐만요" 하며 처제는 곧 핸드폰 검색을 시작한다.

곧 말을 잇는다.

"형부, 그럼 OOOO번 버스를 타셔야 하는데

이 버스는 2 터미널에만 서는 걸로 나와요."

.

.

.

찰나의 정적이지만

둘 사이에는 영겁의 시간이 흐른다.

"어.... 다시 셔틀 타고 가면 되지 뭐.."

"형부, 미안해요. 2 터미널까지 제 차로

모셔다 드리면 좋은데,

저도 지금 집에 볼 일이 있어서요..."

"어.... 괜찮아. 가방 잘 인수인계 했으니 됐어.

잘 가지고 가서 장모님께 전해 드리고.

이제 큰 짐이 없으니 난 괜찮아."

"정말 미안해요, 형부."

"별말씀을. 얼른 들어가서 볼일 보셔, 나 갈게."


이렇게 대충 기분 좋게 인사를 마무리하고

나는 2 터미널로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다리가 저리다 못해 이젠 터질 지경이다.

불현듯 처제에게 농락당한 느낌이 든다.

물론 처제가 이런 상황을 

의도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에

나 자신이 더 초라해진다.

대놓고 미워할 수 도 없고...

속에선 약이 살살 올라온다.

이제 조금 있으면 50인데...


그런들 어떠랴.

나에겐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셔틀버스는 다시 돌고 돌아

나를 2 터미널에 데려다준다.

해는 이미 뉘엿뉘엿 저물어 간다.


지친 걸음으로 터미널 안쪽으로 들어가 

공항버스 티켓을 산다.

역시 대중교통은 한국이 최고란 생각을

오랜만에 다시 해 본다.

다시 기다림.

저쪽에서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가 다가온다.

'자. 이제 진짜 마지막이구나.

공항이여 안녕'


버스가 달리기 시작한다.

해는 이미 서해 넘어 보이지 않고

어둠이 짙어진다.

잠을 자고 싶긴 한데

몸이 너무 피곤할 땐 오히려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장시간 이코노미 지옥을 경험해 본

독자들은 이해할 것이다.


한 15분쯤 달렸을까.

내 앞에 펼쳐진 장관을 바라보며

내 머리는 매우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아직 왜 이 신세일까', 

'미국엔 왜 간다고... 그냥 한국서 살지',

'역시 난 소심한 트리플 A형이야',

'이번 생은 포기해야 하나',

등등의 생각 위로

낑낑대며 이민가방을 싸던 가엾은 내 처의 얼굴,

한국온 아들놈이 찾지도 않는 늙은 부모님의 힘없는 뒷모습,

집을 나설 때 내게 인사하던 토끼 같은 두 딸들,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기분 나쁠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는

처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 버스는 2 터미널에서 1 터미널을 거쳐

서울 목적지까지 가는 버스.

그렇다면 이 버스는 1 터미널에서 

그저 다리 뻗고 기다리면

탈 수 있었던 버스. 

인생은 역시 서프라이즈의 반복.


친구들을 만났을 때는

이미 1차를 파하고 거나하게 취해

술자리를 옮기던 늦은 밤.

내가 늦게 도착한 사연을 듣던 친구들은

정말 배를 쥐어 잡고 웃는다.

나도 웃는다.

웃을 수밖에...


안녕, 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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