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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민 May 03. 2024

첫사랑이라는 선고

퀴어 청소년이 말하는 첫사랑의 기억

첫사랑의 기억


고등학교 1학년, 첫사랑을 경험했다. 첫사랑이라기엔 또래 친구들보다 늦었고, 어쩌면 그래서 더 소중했다. 내가 좋아했던 그 아이는 같은 학교 친구였다.


나는 여고를 나왔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첫사랑이 언제, 누구였냐고 묻는다면 난 고등학교 때 알던 애였다고 답할 것이다. 여자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았냐고 반문한다면 대충 얼버무리거나, 어쩌면 다른 학교에 다니던 애였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 애의 성별을 알아챌 만큼 예민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 비슷한 질문을 한다면, 역시 비슷한 대답을 하겠지만 만약 그 사람이 먼저 여자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는 투의 몸짓으로 대답할 거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학교 애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두세 명을 넘지 않는다.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항상 몽글몽글하다. 어디선가 첫사랑을 새콤한 레몬 맛에 비유하거나, 솜사탕에 비유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첫사랑은 장마철 비 오는 오후 젊고 입담 좋은 선생님께 졸음을 쫓기 위해 해 달라고 하는 이야기, 아니면 쉬는 시간 교실 구석에서 서너 명씩 모여 속닥거리고 키득거리며 나누는 이야기이다.


첫사랑에 대해 나도 (적어도 일부는)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학교 행사 사진에서 내 얼굴보다 그 애 얼굴을 먼저 발견하고, 행사 때 그 애가 무대에 오르면 가장 친한 친구보다 그 애를 확대해서 찍고 싶어지는 기분, 혹은 괜히 머리를 더 신경 써서 묶고 자꾸만 앞머리를 쓸어넘기게 되는 그런 기분 말이다.


첫사랑이라는 선고


하지만 내 첫사랑이자 첫 짝사랑에는 다른 층위가 있다. 첫사랑은 확신이다. 내가 여자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의심이 아니라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물음표에서 느낌표가 되고, 끝내 마침표로 끝을 맺는 과정이다. 그 애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한 번도 연애감정으로서의 사랑을 느껴 본 적이 없어서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연애감정이었다.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되고 싶다는, 서로에게 유일한 관계가 되고 매일 보고 싶은 그런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랴. 나에게, 어쩌면 다른 몇몇 퀴어들에게도, 첫사랑은 선고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전부를 보여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선고 말이다.


간질간질하고 즐거운 추억 뒤에, 그 애와 손을 잡고 걸으면서도, 그 애의 인스타 스토리에 꼬박꼬박 답장을 써 보내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나는 그 애와 절대 좋은 친구 이상이 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 내 사랑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그 애에게 고백을 하는 거였다. 절대 받아 줄 리 없다는 확신 밑에 날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 밑에는 모두가 알게 될 것이라는 불안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 첫사랑은 누구에게든 감히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종종 퀴어 문학이나 영화 리뷰에서 더 이상 고통스러운 퀴어 이야기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 들린다.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고뇌하는 주인공보다는 이성애자들이 그러듯 가볍게 연애를 하는 로맨스 코미디물의 주인공이 보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그런 창작물들이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것은 그런 서사가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아무리 가족과 친구들이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성애규범적 세상 속에서 퀴어의 첫사랑이란 선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이 선고가 아닐 수 있는 세계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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