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생 영희의 고향이야기
'홀치기'는 양단이나 견직물에 적당한 문양을 넣어 많은 점을 찍고 바늘을 이용해 사마귀 모양으로 톡 튀어나오게 단단히 잡아매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을에서는'오비 치기'라고 불렀다. 오비는 기모노를 입고 허리에 매는 넓은 천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 홀치기 한 제품은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그 용도가 오비를 만드는 데 사용한 데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창녕군에서는 60년대에 처음 도입되었고 당시 홀치기의 열기는 무척 뜨거웠음을 마산일보의 창녕소식에서 엿볼 수 있다.
제목 : 홀치기 장려
부제목: 경진대회도 갖고
소제목: 농촌부녀자 부업에 최적
내용: (창녕) 지난 10일 하오 2시부터 창녕경찰서회관에서 군내 부녀자 약 100명이 모여 이색적인 홀치기 경진대회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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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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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군에서는 64년 9월에 시작하여 현재 4천 명의 부녀자들이 홀치기 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동안 약 1만 7천 불의 외화를 획득하였다고 하며 농촌주부로서 하루 최하 50원에서 최고 200원까지 벌 수 있다고 하는데 농촌 부녀자들의 부업으로서는 최적당하여 당국에서는 이를 권장하고 있다. 한편 이날 경진대회에서 입선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1등 이원득(남지읍) 2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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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에서는 고모나 언니들이 농번기에는 농사일을 돕고 저녁시간이나 겨울에 집중적으로 많이 한 것 같다. 큰 벌이는 되지 않아서 부업으로 하다가 대부분은 도시로 나가 회사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영희의 짝꿍인 다섯째 고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집갈 때까지 할아버지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홀치기로 돈을 벌어 화장품도 사고 시집갈 돈도 모은다고 했다.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도시로 취직하러 나갈 기회가 없었던 고모에게 '홀치기'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특기이자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었다.
홀치기의 재료는 오비천과 무명실이고 필요한 도구로는 '오비 틀'과 실을 감아 홀치는 '꾸리'다. 꾸리는 나무로 만든 작은 아령 모양인데 손에 꽉 쥘 수 있는 크기로 양끝은 공모양으로 둥글다.
오비 틀은 바닥에 깔고 앉는 넓적한 나무에 수직으로 기둥이 세워져 있고 나무 위 끝에 둥근 쇠막대가 사선으로 단단하게 붙어있다. 쇠막대의 속은 비어있고 끝이 오므려져 있는데 아주 작은 갈고리를 가진 바늘이 끝에 꽂혀있다. 바늘이 빠지면 송진으로 틈을 막아 불로 데운 다음 바늘을 끼고 식히면 단단하게 고정이 되었다.
실꾸리를 준비하는 과정은 두 단계다. 타래실을 실패나 폐 분유 깡통에 감는 과정과 그 실을 꾸리에 다시 감는 일이다. 홀치기가 아니더라도 당시에는 솜이불을 만들어 덮었고 철이 바뀔 때마다 이불깃을 떼어내어 씻어 말려 다시 시침해서 사용할 때 이므로 굵은 무명실이 많이 필요했다. 물레가 없었기 때문에 그 타래실을 실패에 감을 때는 아이 손이라도 빌려 둘이서 해야 한다. 영희는 고모의 타래실감기의 파트너였다. 어깨너비만큼 팔을 벌리고 손을 피면 고모는 실 한 타래를 영희의 양손에 걸고 팽팽하게 한 후 실을 묶은 매듭을 풀어 실끝을 잘 잡고 분유 깡통에 감기 시작한다. 이때 실이 풀려가는 방향에 맞춰 팔을 움직이며 슬슬 잘 풀리도록 각도 조절을 잘해주는 것이 영희의 기술이다. 팔을 오므리면 실이 느슨해져 한꺼번에 손에서 빠져 헝클어지므로 팔이 아파도 한 타래를 다 감을 때까지는 팽팽하게 잘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감긴 실을 실꾸리에 감는 일은 영희가 할 수 없었다. 적당한 두께를 유지하며 단단하게 감아야 하며 작업하는 사람이 직접 감아야 홀치기 할 때 손 감각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어서 작업 속도를 높일 수 있다.
홀치기 하는 것을 '오비를 친다'라고 했다. 오비를 치는 과정은 왼손으로 오비 천의 회색점을 바늘에 걸고 오른손으로 실꾸리를 쇠막대에 한번 돌려 당겨 내리면 매듭이 만들어져 점 하나가 실로 묶인다. 이것을 풀어지지 않도록 점 하나에 두 번씩 묶어주는 것이다. 실은 자르지 않고 계속 이어지며 다시 바늘을 옆의 점으로 옮기고 홀치는 작업을 반복한다. 꾸리가 쇠막대에 부딪힐 때 '또르륵 또르륵'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로 홀치기 솜씨를 가늠할 수 있다. 속도가 일정하고 빠를수록 숙련공에 가깝다. 우리 고모는 고모친구들 중에서 1등 솜씨는 아니었지만 아주 잘 쳤다.
오비천의 공급과 수거 그리고 대금을 담당하는 사람은 마을마다 정해져 있었다. 우리 마을과 덕산 사람들은 방앗간 왕할머니 집 사랑방에 오비천을 타러 갔다. 오비천에 홀치기 작업을 다하면 길고 매끈했던 천이 쫙 수축되어 그 모양이 마치 검은 무늬가 있는 누에 같았다. 그것을 할머니한테 갖다주면 풀린 것은 없는지 꼼꼼히 검사를 하고 삐져나온 실밥을 깨끗하게 정리를 한 뒤 장롱 속 넣고 다시 새 천을 꺼내준다. 수공비는 정해진 날이 되면 장부기록에 따라 대금을 지급받은 것 같았다.
그런 고모가 홀치기를 그만둔 건 선을 보고 나서다. 연애 한번 못해 본 고모(밤마실 갈 때마다 영희를 업고 나갔기 때문에 남자를 만난 일은 없음을 잘 안다)는 선을 보고 얼마 안 되어 길곡으로 시집을 갔다. 11살 된 영희는 고모가 보고 싶어서 혼자 찾아가게 되는데 영산까지는 빨간 버스를 타고 잘 갔지만 길곡으로 가는 버스정류소를 못 찾아서 그냥 큰길을 따라 걸어갔다. '가다 보면 버스가 오겠지. 길을 모르면 사람들한테 물어가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걸어간 길이 10km 정도 되는 길이다. 한여름 뙤약볕에 비포장도로를 걷고 또 걸어도 버스는 오지 않고 길을 물을 때마다 사람들의 걱정하는 소리가 더 부끄러워 울면서 찾아갔다. 고모집에 도착하고 바로 쓰러져 잠들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고모는 시집가서는 더 이상 홀치기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