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어른
처음 그분 이야기를 TV에서 봤을 때 동화 속 이야기인 줄 알았다. “착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마음씨도 너무 고와 가진 모든 것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면서 같이 행복하게 살았다”와 같은, 어렸을 적에 들어 봤을 법한 그런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느 순간 산타 클로즈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세상에는 남을 돕는 착한 사람이 많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 같이 잘 살 수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때가 설날이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연휴였던 것은 확실하다. 별로 할 일도 없어 TV 리모컨과 시름하던 차 우연히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간극장 같은 방송인 줄 알았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 방송은 경남 MBC에서 특별히 제작한 것이었고, 연휴 극장 개봉 유명 영화로 시청자를 사로잡는 시간에 지방 방송사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을 방영한다는 것도 특이했다. 지방 방송사에서 영화 풍의 다큐를 제작해서 그것도 이 시간에 방영한다는 것이 새롭다는 생각에서 채널을 멈추었다.
진주에 사는, 어떤 어르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매일 아침 방영하는 인간극장과 같은 따뜻한 톤이 아닌, 한 사람에 대한 사실을 건조하게 전달하는 다큐멘터리였다. TV방송이라고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나이 많은 옹골진 지방 신문사 기자가 평생 이웃을 위해 헌신한 한 노인에 대한 취재기였다.
김장하 선생님은 진주에서 남성당이라는 한약방을 오랫동안 하셨다. 그는 한약방에서 번 돈을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썼다. 이런 이야깃거리는 크게 눈길 가는 일이 아니다. 혼자 고생해서 모은 돈을 대학에 기부하거나, 사후 유산을 사회단체에 기증했다는 뉴스를 우리는 종종 접한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운 일이 아닌 줄은 알지만, 그저 지나가는 미담이라고 여긴다. 김장하 선생님의 이웃에 대한 선행도 어쩌면 그런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평범한 우리 이웃의 특별한 선행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퇴직이 벌써 제법 지날 법한 지방 신문 노기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취재하고자 마음을 먹는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선행의 미담이 아닌, 특별나다고 생각해서였다. 젊은 시절 기자는 세상에서 왜곡되거나 곯은 부분을 고발하는 일이 기자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세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록해서 알리는 것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한 마음으로 단단한 결의를 하고 취재하러 갔지만, 인터뷰를 절대 안 한다는 소문에 맞게 그는 일언지하에 만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한약방에 손님으로 찾아가 얼마나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는지, 일 년에 몇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지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김장하 선생님은 입을 닫고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본인의 이야기가 자랑이 될 것 같은 말씀을 일절 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멀뚱멀뚱한 눈으로 딴 곳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여유 있는 독지가로서 장학금을 지원하는 차원이 아닌, 한약방에서 번 돈을 장학사업 이외에도 어려운 예술가를 지원하고, 지역 언론사가 폐간되지 않도록 지원하였으며, 호주제 폐지와 같은 여성운동에도 참여하고 나아가 여성들의 쉼터를 만드는 일을 지원하였고, 지리산을 보호하기 위한 환경운동,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 운동을 계승하는 일 등 그가 지원한 일의 영역을 매우 다양하고 넓었다.
김장하 선생님은 그저 우리가 아는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분이 아니다. 그분은 한약방에서 번 돈을 아낌없이 사회 전반에 돌려주려고 하셨다. 좀 더 평등한 사회, 강자가 완력을 써서 함부로 약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도록 하는 일에 흔쾌히 돈을 썼다. 그러면서 절대 나서지 않았다. 행사에 자리를 마련했지만, 결코 중앙에 앉지 않고, 끄트머리에 앉는 그런 분이셨다.
어떤 것에 뜻을 두고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을 우리는 의인이라고 한다. 평생을 바칠 수 있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인, 그 뜻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민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신념일 수도, 본인의 쌓은 철학적 금자탑일 수도 있으며, 종교적인 신앙일 수도 있다. 김장하 선생님의 오랫동안 끊이지 않고 그러한 일을 할 수 있게 한 그 뜻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여유가 있어 이웃에게 베풀어야지 하는 그런 마음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가 해온 일들은 너무도 다양하고 넓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하도록 했는지 궁금했다.
TV에서 잠시 우연히 보았던 방송이 다시 영화로 상영한다고 해서 극장을 찾았다. 지방 방송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가 극장에 상영한다는 것에 흐뭇했다, 비록 소극장, 인디 극장이지만. 무엇보다도 다시 김장하 선생님을 볼 수 있어 기뻤다. 영화에서는 TV 방송에 없던 부분도 있었다. 40여 년을 운영했던 남성당 한약방이 문을 닫으면서 다큐멘터리는 마무리되었다. 노기자는 말했다. 절대 기록을 남기지 말라고 했던 김장하 선생님의 말씀 때문에 누구도 감히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던 선생님의 이야기를 그나마 기록할 수 있어 다행이고, 나아가 책으로 남기는 일을 할 용기도 얻었다고 했다.
선생님의 평생 마음속에 담은 뜻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는데, 영화를 보고도 알 수 없었다. 흔히 말하는 신의 뜻도 아니고, 민족에 대한 애정도 아니고, 철저한 철학적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뜻이 있어 단순 장학 사업이 아닌 사회 여러 분야에서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흔쾌히 재산을 썼을까? 그것에 대해 그는 말하지 않았다. 왜 자기가 그렇게 한 것인지를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듣기만 했다. 설명이 주장이 되고, 주장이 돈을 받는 사람에게 강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는 절대 자기의 뜻과 생각을 설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한 말이라고는 “아픈 사람 돈을 벌어서 쓸 수가 없었다. 다른 일을 했으면 혼자 호의호식하고 살 수 있었겠지만 아픈 사람 돈으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돌려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삶에서 감동한다고 해도 그처럼 살 자신은 없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는 많은 이에게 향기를 퍼뜨렸다. 그를 안다면 이웃에게 나누면서 착하게 살지는 않더라도 남의 것을 빼앗는 나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살면서 길을 벗어나 탈선하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도 함부로 그렇게 못 하게 하는 마음속에 나를 지키는 어른이 계시기 때문이다. 김장하 선생님은 우리들 마음속의 그런 어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