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퍼붓듯 내렸던 국지성 호우. 이제 장마라는 이름보다 '우기'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법한 여름이 되었다. 축축하게 젖었던 마음을 바짝 말리려는지 뒤미처 무더위가 매섭게 덤벼든다. 우중충한 기분에 빠져들려는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챈 걸까?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아이들의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와아, 드디어 방학이다. "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묵직한 가방과 실내화 가방을 집어던지며 들어왔다. 땀에 반질거리는 얼굴에 신남이 묻어나다 못해 뚝뚝 떨어진다. 다행이다. 아이들과 북적거리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조금 쌓일지언정우울감에 빠질 겨를이없으니까. 한 달을 어떻게 보낼지, 삼시 세 끼는 어떻게 먹일지 고민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계절이 주는 습한 기운을 떨쳐낼 수 있어 여름 방학이 반갑다.
나의 어린 시절엔 하얀 도화지에 주전자 뚜껑을 뒤집어 놓고는 동그라미부터 그렸다. 방학 생활 계획표를 짜는 것은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의식이었으니까. 매일 날짜를 적어 넣고 풀어야 하는 <탐구 생활>을 넘겨가면 말 그대로 스스로 '탐구'하는 방학을 보냈다. 매일 써야 하는 일기에 독후감, 그리기와 만들기는 각 몇 점씩 개수까지 정해져 있었다. 방학 내내 놀며 '탐구'하기도 바쁜데 그 많은 걸 언제 다했나 지금도 의문이다. 엄마의 채근에 개학하기 전날 며칠을 눈물 바람으로 잠든 기억. 그 밤의 답답함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은 방학 생활 계획표는커녕 숙제도 여러 목록 중에 두세 가지 정도만 선택해서 하면 된다. 이름만 방학 숙제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운동하기>를 선택했다면 날짜를 적고, 수행했는지 표시만 하면 되는 단순한 체크리스트 정도다. 첫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처음 맞은 방학에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내가 어른이 된 시점으로 봐서 그런 걸까? 개학 전날 숙제를 다 못해서 눈물 바람을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방학 첫날, 9시 넘어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들이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미야, 뭐 재미난 거라도 내와봐라!'
스스로 야생의 자연을 즐기며 '탐구'하던 시절은 지났다. 특히 현대 아이들의 삶은 여름을 '탐구'하기에 더더욱 어려운 것 같다. 굳이 그 각박한 현실까지 여기에 끌어오지는 않으련다.
부은 눈꺼풀 아래로 초롱초롱한 눈이 빛난다. 벽에 걸린 달력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이들을 불러 모아야겠다. 동그란 방학 생활 계획표를 그리는 대신 각자 방학동안 하고 싶은 일을 얘기하고 스케줄을 짜봐야겠다. 수영장도 가고, 계곡도 가고, 독서는 싫겠지만 도서관도 가고... 우울감이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달력을 꼼꼼히 채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