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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헤다 Apr 06. 2023

길고 어두운 터널의 시작

결국은 계류유산이었다.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피가 주르륵 나왔다. 붉은 피를 보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안 그래도 진행 속도가 느린 편이라 불안했는데, 피까지 보다니. 좋지 않은 예감에 하루종일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조퇴를 하고 간신히 병원에 도착했다. 오늘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 간호사에게 하혈을 했다고 말했다. 대기하는 내내 초조한 마음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우리 도이, 잘 있겠지?


지난주 금요일 아기집을 확인하던 날, 의사 선생님께서는 2주 뒤 크리스마스이브에 심장소리를 들으러 오라고 하셨다. 그 약속이 설레어 두근거리던 기분이 아직도 선연한데, 일주일 만에 나는 불길한 그림자를 짊어지고 다시 의사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입덧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더욱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임신 증상이 하나도 없었다. 입덧은커녕 그 흔한 가슴 통증조차 없었다. 유산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할 때에는 입덧을 하지 않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달이 느리게 진행되니 불안한 마음이 너무 커져서 힘들었다. 차라리 입덧이라도 하면 임신이라는 확신이 들 텐데, 그런 증상이 정말 하나도 없어서 늘 불안 속에 휩싸여서 지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일단 초음파를 봤다. 지난주에 아기집을 봤으니 최소한 난황은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오늘 흐른 피는 그저 자궁에 고여있던 혈액이 나온 것뿐이고 나의 임신은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면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새카만 아기집. 의사 선생님은 아무 말도 없이 이리저리 아기집을 살폈다. 그러다 결국 무거운 목소리로 역설적인 소식을 전했다. 유산 가능성이 크니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그러나 다음 주에 아기가 생길 수도 있으니 초음파를 보러 오라고.


나의 감정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 역설적인 문장을 말하면서 분명 괴로운 눈빛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전해 들은 산모의 눈물이 마스크를 다 적시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어깨를 들썩이던 나는 알아듣지도 못할 목소리로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


"추운 날 나가지 말고 집에 누워만 있었다면, 유산이 안될 수도 있었을까요?"

"임신한 걸 알고도 필라테스를 계속 했는데, 안 했더라면 아기가 건강했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산모의 잘못이 아니라며 위로를 했다. 그러나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이 불행이 내게 닥친 의미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차라리 나의 잘못으로 생긴 일이길 바랐다. 나의 부주의로 생긴 불행이라면, 그나마 나를 비난하고 자책하면서 견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추운 날 무리하게 약속을 잡지 않았더라면, 임신을 알자마자 바로 집에서 쉬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다 첫임신에 들떠 성급히 태명을 지어주고 여기저기에서 일찍 축하를 받은 것부터 비극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비합리적인 사고를 만들어냈다.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덧붙였다. 유산될 아이는 누워만 지냈어도 결국 유산이 되고, 건강하게 태어날 아이는 어떤 일이 생겨도 결국엔 잘 태어난다고. 나에겐 잔인한 말이었다. 행복하게 그리던 그 미래가 사실은 애초부터 비극적인 결말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쁨에 겨워 초음파 앨범을 꾸미던 내 모습, 자기 전에 항상 내 배에 손을 올리고 태명을 부르던 남편, 책장에 꽂혀 있는 여러 육아서적들,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토끼 양말. 이 모든 게 부질없는 노릇이었다니.


진료실에서 나오자 간호사가 텅 빈 아기집이 찍힌 초음파 사진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사진을 받아 드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화장실로 가 대충 정돈한 뒤 주차장으로 나갔다.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차 요원이 힐끔 쳐다보는데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집으로 운전해서 가는 동안에도 눈물이 계속 앞을 가렸다.


집에 들어가 불도 켜지 않은 채, 웅크리고 누워 초음파 사진을 계속 바라봤다. 이렇게 눈물이 계속 나올 수도 있구나를 생각하며. 그땐 방안을 환히 밝힐 수가 없었다. 빛이 내 마음 속에 생긴 상실의 구멍을 비추는 듯, 눈부신 아픔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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