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필수불가결한 경제적 요소들에 관하여
드라마 <사랑의 이해> 속 네 주인공이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드라마는 믹스 커피를 마시는 종현(정가람), 원두커피를 갈아 핸드 드립으로 마시는 수영(문가영), 캡슐 커피를 마시는 상수(유연석), 그리고 가정용 에스프레소 추출 머신을 이용하는 미경(금새록)을 차례로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네 계층을 보여준 이 장면은 시청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기회라고 생각했던 은행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선을 긋는다는 걸. 때론 아주 사소하게, 때론 너무나 노골적으로. 그리고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출발이 다르니까. 공평한 기회처럼 보이는 일도 교묘한 차별일 뿐, 선 밖에 있는 사람은 선 안쪽으로 쉽게 넘어갈 수 없다. 상처받지 않는 방법은 그냥 인정하는 것. 이곳에서 나는 선 밖에 서 있는 사람이다. (사랑의 이해 2화 중 안수영의 내레이션 일부)
<사랑의 이해>의 네 주인공은 모두 은행에서 일한다. '돈'과 직결되는 은행이란 장소는 돈으로 결정되는 '보이지 않는 선'을 형상화한다. 은행 소속도 아닌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원 경찰 종현, 고졸 출신의 텔러 수영, 명문대를 나와 종합상담팀 계장으로 근무하는 상수, 소위 말하는 금수저로 태어나 명문대를 나오고 고속 승진을 한 뒤 PB상담과 VIP를 담당하는 대리 미경의 보이지 않는 선은 그들이 근무하는 자리, 사원증 목걸이의 색, 응대하는 고객, 상사에게 취급받는 방식 등으로 보이게 된다. 겉으로 볼 땐 알 수 없던 사람들의 경제적 배경도 은행에서 어디에 앉아 어떤 상담을 받는지에 따라 쉽게 드러난다. <사랑의 이해>는 이러한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다.
<사랑의 이해> 속 인물들은 지나치게 철이 들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경제활동을 해왔고,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대다. 치열하게 사랑을 하기엔 조금 지났고 현실적으로 사랑 그 이외의 것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이외의 것들은 결국 돈 문제로 귀결된다. 인생에서 경제적인 요소는 뗄 수 없는 하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해를 따지는 건 당연한 과정이다.
아주 부자이지도 또 아주 가난하지도 않은 중산층의 상수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과 가장 비슷한 위치의 인물일 것이다. 그러니 사랑에 망설이는 상수를 답답해하는 건 드라마에서마저도 지극히 현실적인 그 모습에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된 일종의 자기혐오다. 반대로 사랑에 직진하고 밝은 미경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 경제적 여유에서 오는 모난 데 없는 모습을 향한 동경이다. 사랑에 솔직하지 못한 수영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듬직한 남자친구가 되어주지 못하는 종현의 그늘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싫증 내는 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계층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무의식적인 무시다.
그렇기 때문에 작중에서 '멋있고 쿨한', '구김살 없는' 미경의 태도는 살면서 아래 계층 사람들의 생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적 없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이든 경험하지 않으면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미경의 행태는 상수, 수영, 종현이 각자의 생활을 경험해 본 적 없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그러니 미경의 호의는 때때로 변질된다. 안 쓰는 명품 가방과 옷을 선뜻 주는 미경이 과연 수영 입장에서 고맙고 멋있게 느껴질까. 누구는 미친 듯이 노력해도 겨우 닿을까 말까 한 것들을 쉽게 쥐고 흔드는 모습은 심리적 부담감을 넘어서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미경이 의도했든 아니든 평범한 빌라에 사는 수영의 집에 호화 주택에나 어울릴 듯한 샹들리에를 선뜻 선물하는 것은 호의라고 보기 어렵다. 수영이 이에 상처를 받는 것을 열등감으로 치부할 수 없다. 미경이 멋있고 당당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배려 있고 타인을 잘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경은 다른 부잣집 자녀들과 다르다고, 다르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자신하지만 정말 그 경제적 배경을 다 내려놓고 자력으로 대학을 가고, 성적 장학금을 타고 은행에 취직해서 고속 승진을 했을까. 미경은 남들과 달리 화려한 경제적 배경 대신 평범함을 용기 있게 택했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그 '평범함'이 선택이 아니라 평생의 꿈이고 생존이다. 미경에게 그것들이 스펙이 될 수 있는 건 미경이 그토록 부정해 온 경제적 배경 덕분인 건 명백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부정하는 다른 상류층과 같이 취급되는 것에 관한 미경의 한탄을 듣는 상수의 표정이 씁쓸하고, 미경이 선물한 비싼 외제차와 코트를 상수는 거절할 수밖에 없다. 이는 사랑할 여유는 있으나 그에 따른 책임감은 제법 크게 다가오는 중산층 상수 입장에서 '끝을 생각했을 때'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된 미경과는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음에도 역으로 예상치 못한 불행이 덮친 이유가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랑의 이해>의 제목에서 '이해'의 의미는 利害, 즉 '이익과 손해'에 가깝다. 드라마에서 사랑은 작가가 사회생활에서 필수불가결한 금전적인 문제를 네 계층의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기 위해 택한 하나의 수단적 요소다. 갖고 싶은 건 다 가지면서 컸을 미경이 원하는 사랑 하나는 갖지 못해 떼쓰듯 하는 행위와 어차피 갖지 못해 포기하면서 살아온 수영이 사랑을 포기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행위의 대비는 경제적 환경이 주는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누구는 사랑 앞에서도 강자이기에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있는 반면 누구는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쳐야 하는 상황은 어쩌면 당연하다. 누구는 당당하고 누구는 회피형이라며 단순히 좋고 나쁘고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이 망가진 사랑의 관계 속에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종현은 수영보다 우위의 권력을 지닌 것으로 그려지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민 여성'의 위치가 여실히 드러난다.
현실은 멜로 영화가 되지 못해 이해(理解)를 하기 위해 이해(利害)를 따져야 하는 상황들이 존재한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마지막까지도 상대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실에서도 계층이 존재하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랑의 이해>는 사회에서 마주해야 하는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경제적 환경과 계층이 주는 한계, 그래서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내세워 한 번쯤은 이해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와 드라마가 가상이지만 현실과 가장 맞닿아있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간접 경험을 선사하는 것처럼, <사랑의 이해> 역시 미경, 상수, 수영, 종현의 입장을 간접적으로라도 한 번쯤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경제적 장벽을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이해와 배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