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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e Aug 09. 2023

고전, 다야마 가타이의「이불」

억압받고 소모되는 여성

이십대 초반에는 현실을 완전히 잊을 수 있는 공상과학 소설이나 현실을 헤쳐나갈 꿈과 희망을 주는 책만 편독했다. 그런데 현대소설 도장깨기를 시작한 이래로 책을 읽으면 우울함이 극에 달하는 바람에 지금은 거의 취미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소설「이갈리아의 딸들」은 그 자체로 판타지나 다름없어서 읽는 내내 충격과 쾌감을 번갈아 느낄수라도 있었는데, 그 외의 페미니즘 서적은 읽을수록 어째 비통하기만 했다. 현실은 이랬고 나 또한 이런 바위에 짓눌려 지냈구나. 결국 더 배우고자 하고 깨닫고자 하는 사람만 자기검열로 이중고를 겪고 있으니 무슨 자기학대란 말인가?

 

어쨌든 지금의 국내 현대소설(에세이가 아닌 소설)에서 유쾌함과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유명한 작품을 놓치기는 싫어서, 결국 묵혀두던 채식주의자를 집어들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교수님이 강의 중에 자주 언급하셔서, 아마도 여성향 소설이거나 대놓고 페미니즘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얼추 들어맞았다. 다소 자극적이고 크리피한 서술방식이기는 하지만 신체적, 정신적으로 폭력당하는 여성의 모습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소설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학부생 시절 계절학기 강의로 접하게 된 1920년대 일본의 고전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을 읽다가, '억압받는 여성'을 그렸다는 면에서 채식주의자와 맥이 통한다고 생각했다. (이불의 경우 여성에게 프레임을 씌워 억압하는 남성의 시각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두 소설이 쓰여진 의도가 아주 정반대이기는 하지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20년대 일본(생각해보니 국권피탈 이후 딱 일제강점기임)으로, 근대화의 영향으로 여성을 위한 공교육체제가 자리 잡던 때다. 작중 화자는 작가 자신인데, 자신이 업으로 삼는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종적으로 육아만 하는 '구여성'인 아내를 슬슬 한심하고 지겨워하던 차. 그러던 중 매력적인 외모의 신여성(여학생)이 문하생이 되길 간청하자, 여자가 감히? 조신한 어머니가 되어야지! 하며 튕기면서도 곧 방문할 그녀가 ‘봐줄만 한 외모’이길 바라고 있다. 고차원적이고 숭고한 자신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할 정도의 교육을 받은 신여성인 동시에 조신함을 잃지 않아야 하는데, 외모는 봐줄만 해야 한다. 유니콘인 듯.

 

이불과 채식주의자의 공통점을 하나 더 발견했는데, 여성을 자신의 심오한 예술작품의 뮤즈쯤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의 두번째 작품 '몽고반점'에 등장하는 영혜의 형부, 그리고 이불의 화자 도키오는 상황적으로 약자인 여성을 보고 성욕을 느끼며 그것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든다.

 

요즘 나는 예전만큼 분노하지 않는다. 나를 억압하던 시선은 사실은 허상이니 천천히 내려놓아도 된다고, 인생의 목표는 좋은 남자 만나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어도 좋다고. 이런 개인의 자각이 큰 힘을 가진다는 걸 아는데도 아직 나는 내가 살아낼 30대와 40대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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