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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e Nov 16. 2023

슬플 땐 도시락 싸기

때로는 아주 일상적인 루틴이 나를 구한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의 경우 슬플 때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 음식을 먹고, 맛을 느끼고, 소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아주 번거롭게 느껴지는데 또 배고픔은 참기가 어렵다. 괴로운 배달 어플 탐방을 마치고는 그냥 굶거나, 과자를 먹는 등 건강하지 않은 한 끼를 때워버리고는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 한 점에도 예민하게 흔들리는 사람일수록 이런 사소한 루틴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 새삼스레 깨달았다. 예를 들어 그날 몇 잔의 물을 마셨는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깨끗하게 씻고 향 좋은 바디로션을 발랐는지 같은 것들.


마음이 어지러운 요즘 내가 빠진 루틴은 바로 요리다. 더 정확히는 도시락 싸기. 자취 한 시간은 짧지 않지만 늘 집에서 부모님이 올려 보내주는 반찬을 먹거나 빵 같은 간단한 음식을 사 먹던 나는, 요리를 해야겠다는 용기를 내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을 들였다.

이십 대 초반의 내가 식이장애와 함께했던 이유도 '요리' 그리고 '끼니'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 관련이 있는데, 나에게 음식은 빨리 먹어치워야 하는 것, 지금 당장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식재료를 사서 다듬고 요리해서 먹는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건강에 좋지 않고 자극적인 음식은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심리적 허기를 느끼면 늘 편의점에 가서 초콜릿이 가득한 빵을 사 먹었고 밤마다 100킬로가 넘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괴로움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난다. 내 인생을 잡아먹을 것 같던 식이장애를 뒤로 하고, 나는 직접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내 돈으로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평범하지만 치열한 직장인이 되었다.


직장인의 점심이란, 합리적인 가격대에 '때우는' 것일 때가 많다. 만족스럽고 정성스러운 한식을 서울에서 만원 이내로 먹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됐다. 그러던 중 '이럴 바에 내가 만들어 먹지' 하는 마음이 들었고, 은근히 충동적인 성향이 짙은 나는 그날 저녁 당장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식재료를 샀고, 기본적인 요리에 넣을 수 있는 양파와 감자도 조금 샀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켜 에어프라이어 위에 올려두고,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는 것이다.


1. 조리도구와 프라이팬/냄비 등을 한 번 헹군다.

2. 중불에 프라이팬을 달구고, 순서대로 요리할 재료를 꺼낸다.

3. 밥을 볶거나 소시지를 굽는다.

4. 양파를 볶고, 계란을 꺼낸다.

...


이런 과정에서 스스로의 식단과 살림을 책임진다는 자아효능감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많이 먹거나 조금 먹는 사람은 스스로가 먹을 양만큼 조리할 수 있고, 자신이 먹을 음식을 직접 보며 요리하는 과정은 먹는 사람(나)을 안심하게 만든다. 플라스틱이나 종이 박스가 아닌 내 취향의 깔끔한 식기에 밥과 반찬을 담아서 식사하는 시간은 내가 나를 대접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식후에 배달용기 등 쓰레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다.


사람은 정말 연약한 존재인 것이, 일상에서 늘 해야만 하는 루틴 중 한 가지만 어그러져도 몸과 마음이 서서히 망가지는데 바쁘게 사는 사람일수록 그런 먼지 같은 변화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요즘, 우울하고 절망적일 때마다 스스로에게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인다. 기운이 없고 시들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일 때는 물을 충분히 마셔준다. 몸이 축 처지고 몇 걸음만 걸어도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릴 것 같은 날에는 마음에 드는 운동복을 입고 근력운동을 하러 나선다. 이렇게 해서 나를 고쳐 쓰는 것이 어쩌면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삶에서 마주할 많은 과제들을 힘내서 해결해 나가려면 당장 하루 세끼를 잘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을 키우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내게는 '퇴근 후 도시락 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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