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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엄마 Jan 31. 2024

'평범하게' 산다는 것

 


갑자기 온수가 안 나오고 난방이 안 된단다.

언젠가 인기 드라마에서 "따뜻한 물이 안 나오는 집에서 살아보셨냐"며, 남주가 살아온 환경이 본인의 것과 너무 다름을 설명하며 이별을 고한 여주의 대사가 떠올랐다. "그 집이 바로 이 집이에요."


1월 17일 저녁. 일부 양천구와 구로구의 약 3만 8천 세대에 온수와 난방이 끊겼다. 노후된 배수관이 터져서라고 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니 요즘 세상에, 따뜻한 물이 안 나오는 집이 어디 있어?'라고 생각했는데, 일시적이나마 그 집이 우리 집이 되었다.


아이를 씻기는 게 급선무였다. 물을 끓여서 미온수를 만들어 수건에 적혀 아이의 몸을 대충 닦았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어제 씻기지 않은 나를 반성했다. 정말 인생이란 한 치 앞을 모르는 거구나.


사실 물보다 더 걱정인 건 난방이 안 된다는 거였다.


우리 집은 임대사업자 전세 물건으로, 같은 아파트의 다른 전세 물건들보다 가격이 월등히 저렴한 탓에 입주 시 집주인이 수리를 일절 해주지 않았다. 오랫동안 물기에 노출된 탓에 썩어빠진 화장실 문도 우리 돈으로 교체하고 들어왔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25년 정도 된 아파트인데, 새시는 25년 전 처음 입주할 당시 이후로 한 번도 수리되거나 교체된 적이 없었다. 매년 겨울이 되면 베란다 창문에 뽁뽁이를 붙이고 생활했고, 폭설이 있는 날엔 커튼을 치고 난방을 풀로 돌려도 거실 문 사이로 찬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그런 우리 집에서 한 겨울인 오늘, 난방이 안 된단다. 얼마 전 장염으로 입원까지 했던 아이가 다시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이 밀려왔다.


창가에 있는 침대 말고 바닥에서 자기로 했다. 아이와 창문에서 가장 떨어져 있는 구석에 자리 잡았다. 침대에 올라가서 자고 싶다는 아이를 "오늘은 위에서 자면 아야 해, " 말하며 달랬다. 아이의 옷을 따뜻하게 입히고, 나도 내복을 꺼내 입고, 무거운 이불을 덮었다. 난방 없이 어떻게 자지, 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아이와 꼭 붙어서 자니 생각보다 춥지 않았고, 아침이 왔을 땐 아이는 침대에 올라가 창가에 붙어서 자고 있었다. 옷을 너무 따뜻하게 입혀서 오히려 더웠나 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친구 중 하나가 내게, "난 평범하게 살고 싶어.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아."라고 했을 때, 나는 "왜 평범하게 살아야 해? 난 특별하게 살 거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는 살고 싶지 않아."라고 답했었다. 그때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이좋은 엄마와 아빠,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주는 여러 친구들, 특출 나지는 않지만 썩 나쁘지도 않은 머리, 온수와 난방이 되는 따뜻한 집. 무심했던 내 탓인지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이런 것들을 '당연하게'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 대학을 가고, 나의 온전한 가정을 가지고, 직장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특히나 사회적 시계(social clock)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되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제 때'에 졸업하고, '제 때'에 직장을 가지고, '제 때'에 결혼하고, '제 때'에 아이를 낳고, 그렇게 순탄하게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 중 어느 것도 '당연한' 것은 없었다.




요즘 집값이 떨어지고 있다고 하여 전세 생활을 접고 회사 근처 아파트를 매매할까 고민이다. 수리 안 된 구축 전세로 살고 있는 마당에 온수까지 안 나온다고 하니 짜증이 몇 배는 더해졌던 것 같다.


신혼 초 남편과 10평 남짓 빌라 생활을 하다, 아이를 낳고 20평대 구축 아파트 전세로 오게 됐고, 이제는 인생 최대의 쇼핑인 아파트 매매를 고려하고 있는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평범하고 평탄한 여정을 지나고 있지 않은가 싶다.


얼마 전 오랜만에 과거 즐겨 듣던 Sheryl Crow의 'Soak Up the Sun'이라는 곡을 우연히 다시 듣게 되었다.꽂히는 가사가 있었다.


"It's not having what you want; it's wanting what you’ve got."

("중요한 것은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특별하진 않지만 그것보다 더 감사한,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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