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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엄마 Jun 22. 2024

내시경이 끝나고 제일 먼저 한 일


인간은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내 행동이 딱 그 꼴이었다. 내 몸에서 암세포가 자라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내시경이 끝나고 몽롱한 정신으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다가올 회사 행사의 명찰 디자인에 참고할 예시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내가 기획 및 총괄을 맡은 이 행사는 프랑스에 기반을 둔 모(母) 회사에서 개최하는 행사로, 매년 전 세계 각국에서 시행하는 업계에 있어 가장 큰 연례행사였는데, 올해는 20년 만에 한국에서 개최 예정이었다. 업계 어느 회의나 행사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받고 있는 행사인 만큼 회사의 기대뿐만 아니라 정부의 관심도 컸고, 기자들도 백여 명 정도 몰릴 예정이었다.


국제 부서에 발령받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다른 나라에서 개최된 행사에 많이 참여해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여러 외국 손님들이 참석하는 이 행사를 망치면 한국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 극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런 중에도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에 작은 디테일 하나도 꼼꼼하게 챙기려 했고, 스케줄을 맞추려면 다음 단계로는 어떤 일들을 진행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고 있었다.




“나 포로포폴 맞고 올게.”


 ‘위암 전단계’라는 꼬리표를 가진 ’장상피화생‘ 이라는 질병을 관리하며 사는, 육아와 불면증으로 꼬박 4년이란 기간 동안 편히 자본 적을 손꼽는 나에게, 수면내시경이라는 국가가 허락한 적정량의 포로포폴을 맞는 시간은 잠시라도 부담 없이 푹 잘 수 있는 달콤한 시간이었다. 그날도 이준이를 보기로 한 남편에게 포로포폴을 맞고 오겠다고 농담을 하고 집을 나섰다. 꿀잠을 자고 일어나 비몽사몽 한 상황에도 일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핸드폰으로 행사에 사용할 명찰 시안을 인터넷으로 뒤졌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찾아 추후 참고를 위해 캡처를 하고 계약한 대행업체의 과거 행사 사진들을 뒤적였다.


"심한 위염이 관찰됐고요, 장은 별 건 없었고 작은 용종이 하나 있어서 뗐습니다. 조직검사 맡겨놓았으니 다음 주에 문자 받으시면 결과 들으러 오시면 돼요."


심한 위염이야, 장상피화생 진단 이후 늘 듣는 소견이었고. 용종 작은 건 잘 보이지도 않는데 뭘 뗐다는 거지? 갸우뚱했지만 알아서 해주셨겠지 가벼운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섰다.

겨우 하나 발견된 별거 아니라던 그 작은 용종이 암인 줄도 모르고, 나는 또 행사를 위해 주말 근무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확률 싸움의 연속이었다.


일단, 만 35세의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흔한 커피조차 마시지 않는 여성이 직장암에 걸릴 확률부터가 그리 높지 않다. 대장내시경은 만 40세부터 권장사항이었으므로 매년 하는 회사 종합검진에서도 한 번도 대장내시경을 받아볼 필요성조차 못 느꼈었다.


다음으로, 이렇게 작은 크기로 발견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직장암은 증상이 없어 증상을 느끼고 검사를 받아 발견하게 되면 주로 항암치료를 동반해야 하는 기수라는데, 나는 1기 중에서도 극초기라 항암치료도 안 받아도 되고, 수술만 받으면 된단다. 이 부분에서 의사가 자꾸 천운이라고 했었다.


Neuroendocrine Tumor 신경내분비종양. 내가 가지고 있는 암덩어리의 이름이다.  신경내분비종양을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면 “매우 드물게 발견되는 질환“이라고 제일 먼저 나오며, 희귀 암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최근 10년 간 환자 수가 10배 증가하며 희귀 암 꼬리표를 뗄 수도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위치도 너무 좋다고 했었다. 항문 가까이에서 발견되면 직장 절제 시 인공장루를 달아야 할 수도 있다는데 나는 그럴 걱정은 전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다시 한번 의사가 내게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영어에 ‘blessing in disguise’ 라는 말이 있다. 뜻밖의 축복, 즉, 불행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축복이란 의미이다. 암을 얻어 불행이 닥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암세포는 항암도 안 해도 될 만큼 작고, 이 기회에 회사도 쉬어가며 건강에 더 신경 쓸 수 있으니, 내 상황이야말로 전화위복의 정의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아직 모든 것이 억울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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