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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땅 Nov 12. 2023

PeeP SHoW

3. 막차를 탄 연인

만나기 2시간 전. 오후 3시


오늘은 꼭 말해야 한다.

이제 헤어져야 한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그녀에게 말해야 한다.


만나기 1시간 전. 오후 4시


집을 나서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본다.

담배와 라이터, 핸드폰, 차키가 손에 잡힌다.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약속장소보다 3 정거장 전에 내려 천천히 걷는다.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중고거래를 통해서다. 캠핑이란 것에 흥미를 느끼고 취미를 가져갈 즈음에 캠핑 텐트를 아주 싼 값에 판다는 매물이 눈에 띄었다.  빠른 판단과 결단력으로 장비를 직거래로 거래하기 위하여 약속장소에 나가서 마주치게 된 상대방이 그녀였다.  

'이쁘다.' 하는 생각으로 값을 지불하고 텐트 챙겨 돌아설 때에 그녀가 말했다.

" 혹시 캠핑. 자주 다시시나요? "

" 아.. 친구들과 몇 번 다녀보고, 이번에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하는데요."

속으로 좀 아는 척, 전문가인척 하려다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캠핑장비도 처음 장만하는 주제에..

" 네....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분명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렇게 그녀와 나의 첫 만남과 거래는 끝이 났다.


그렇게 혼자 캠핑을 다니며 자연과 자유스러움에 흠뻑 빠져 지내던 날 중에 그녀를 다시 만났다.


이르는 점심을 마치고 개울가에 앉아서 물멍을 하던 중에 그녀 또한 한 귀퉁이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머리를 푹 숙이고 손가락으로 흐르는 물을 휘휘 저으며 주변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듯이 앉아 있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바로 나야'라는 독특함이 있었으니.


한참을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보통의 날이라면 의자를 제치고 누워 낮잠이라도 자야 하겠지만 그날은 잠도 오지 않았다.  다시 그 자리로 그녀를 보러 갔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주변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날처럼 복잡한 출근 지하철 안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다.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몸을 지탱하며 버티는 중에 그녀가 내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눈을 감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었지만 이번에도 그녀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핸드폰을 보는 척하면서도 그녀를 힐끔힐끔 바라볼 때 내 심장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 오늘은 좀 어떻게 해봐. 이 바보야.'

내가 내려야 할 역이 다가오자 내 심장은 더 많이 소리쳤다.

' 멍청이. 바보. 병신. 머저리. '

갑자기 그녀가 일어나 출입구 쪽을 향했다.

하지만 가득 찬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의 벽에 막혀 움직임이 쉽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개미소리 같은 그녀의 안절부절못함은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 잠시만요, 좀 내릴게요. 죄송합니다. "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난 큰 소리로 외치며 손을 뼏쳐가며 사람들 사이에 길을 만들어 나갔고 그녀에게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하였다.

'세이프'

아슬아슬하게 지하철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이렇게 저렇게 하여 우린 연인이 된 것이다.


만나기 10분 전. 4시 50분.


그녀는 나에게 다가 온 천사였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우리가 숨 쉬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쓰디쓴 커피가 얼마나 달콤한지

무수히 많은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나에게 알려주고 떠났다.


그랬다. 그녀와 내가 만나고 4년이 지난겨울에 그녀는 병실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이고 떠나갔다.


약속시간 3시간 후. 오후 8시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에서 만났다.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오늘은 무엇을 할지,

이번 주, 내년에는 이렇게 계획하고 미래를 이야기했었다.


시간의 경과는 의미가 없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약속 시간이 다가오면 설레고 다시 실망하고 그렇게 멈춤이 반복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예전처럼 자주 이곳에 오지는 못하지만 매주 수요일은 빼놓지 않았다.

그녀는 수요일을 참 좋아했다.

" 물 수, 빼어날 수 같은 요일이잖아.  처음도 아니고 끝도 아니고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좋아. "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도 그 이후로 수요일이 좋아졌다.


카페를 나와 한참이나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차량들, 도시의 불빛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곧 크리스마스도 다가올 텐데.

겁이 났다. 잘 버틸 수 있을까?

어느덧 시간은 자정이 되었다. 갈 때는 지하철을 타고 가고 싶었다. 인적이 드문 시간 지하철 승강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승강장에 곧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소리가 요란하다.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가...'


멀리 지하철이 스크린 도어 안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안에 그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즈음 내 몸이 빨려가듯이 그 열차 안으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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