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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땅 Dec 12. 2023

신의 후회

7. 운명

손 끝으로 꼼지락거리며 한참을 망설였다. 

지폐 한 장, 두장.

이천 원이면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더욱이 이 돈은 엄마가 나를 이곳에 두고 가시며 내 손에 꼭 쥐어주고

가셨던 나의 마지막 쌈짓돈이다. 

난 길가의 레코드가게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내 귀에 들어온 천둥소리 같은 음악이 나를 흔들고 있었다.

" 아저씨, 지금 나오는 음악이... 어떤 거예요? "

" 베토벤이라는 서양 작곡가의 운명 교향곡이란다. "

그날 레코드가게 사장님은 친절하게 나에게 설명해 주셨다. 

난 속으로 까먹지 않기 위하여 혼잣말로 암기하였다. 

' 베토벤. 운명. 운명교행곡, 베토벤, 베토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 사라지고 그 멜로디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 콰과광 쾅, 콰과광 쾅 '

대포와 천둥이 함께 휘몰아치며 칙칙하고 어두운 하늘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나팔과도 같은 긴 고음과 함께 평화롭고 아름다운 소리들이

춤을 추듯 뒤를 이었다. 방심한 듯 취해있던 순간에 다시금 천둥소리들.

내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듯 이어지는 가득 찬 화음들이 흘러나왔다.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의 쉼터 생활은 뒤죽박죽이었다. 

아침의 기도와 함께 아침식사도 사라졌다. 

수업시간은 아무것도 안 할 때가 더 많았으며, 

우리를 찾아오시던 자원봉사자들과 선생님들의 수도 확연히 줄었다. 

주민센터에서 간간이 나와 이리저리 둘러보고 가는 것이 전부였다. 

울타리가 망가진 농장의 가축처럼 우리는 자유롭게 외부로 나갈 수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동네 한 바퀴를 돌듯 이리저리 헤매고  돌아다닌 듯하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던 레코드가게 앞에서 이 음악을 듣게 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또 어떤 불행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가득 찬 무렵이었다. 


" 아저씨, 저 베. 토. 벤.. 운. 명 주세요. "

난 나의 전재산을 꺼내어 아저씨에게 내밀어 보였다. 

꾸깃한 이천 원을 바라보던 아저씨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 그런데 너는 이걸 뭘로 들을 거야? "

".... 어.... 어....."

전혀 예상하지도 준비하지도 못한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플레이어가 뻔히 없어 보이는 아이가 카세트테이프를 산다고 하니, 답답하고 측은해 보였을 것이다. 


" 이 테이프는 이런 기계가 있어야 하거든. "

한쪽 구석의 오디오 장치들을 가리키며 아저씨는 나에게 말했다. 


" 있어요. 집에 가면 있어요. " 

거짓말이다. 완전 거짓말. 하지만 난 너무나 당당하게 말했다. 

그만큼 가지고 싶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좋다. 

이미 그 소리들은 내 머릿속, 가슴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비닐 포장된 네모난 카세트테이프를 손에 들고 난 걸었다. 

그 길은 쉼터가 아닌 전혀 다른 길로 이어져 있다. 

분명 신은 나의 길을 준비할 것이고 난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면 될 테니까.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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