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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땅 Feb 26. 2024

결혼식장을 다녀오면서

우린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한 달여 전 핸드폰에 문자 알림이 왔습니다.

이젠 편리해지고 흔해진 '모바일 청첩장'이라고 합니다.

'누구와 누구의 결혼식에 초대합니다.'


신랑, 신부의 이름은 낯설지만 혼주의 이름을 보니 이제 누군지 반갑습니다.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구나' 싶습니다. 

어릴 적 조그마한 손으로 내 손가락을 잡고 따라오던 아이가 떠 오릅니다. 


이내 또 다른 고민이 생깁니다. 

' 결혼식장에 가야 하나? '

왜냐하면 혼주는 꽤나 유명했던 연예인입니다. 물론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 중입니다.

보통의 결혼식 소식에 이런 고민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당연하게 갈 수만 있다면 가서 축하해 주는 것이 내 의무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번엔 좀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손님들이 많아도 너무 많을 텐데, 가서 앉을자리 나 있을는지 '

' 시내 유명 호텔에서 식이 열리는데, 축의금을 더 해야 하는 건지 '

' 축의금만 송금하고 내 마음만 전하면 되는 게 아닌지 '

' 그래도 직접 가서 축하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게 맞는지 '


동문 선, 후배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 너 이번 그 선배 아들 결혼식에 갈 거니? "

" 글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

대략 십 여일을 앞두고 이런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그러던 중 선배하나가 카톡으로 답을 내려 주었습니다. 

" 그 선배에게 우린 일 순위야. 걱정하지 말고 와! "


' 일 순위 ' 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라는 말과 합쳐지면서

강력한 힘을 내고 있었습니다. '전우애' 보다 강력한 끈끈한 접착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의 고민은 끝이 나고 무사하게 결혼식장에 다녀왔습니다. 

정말로 우리들만을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오래 오래간만에 보는 선, 후배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다양한  초청 연예인들의 춤과 노래에 이어서

신랑, 신부와 그 가족들의 화려한 퍼포먼스는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새 출발을 시작하는 커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을 기원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창 밖의 컴컴한 벽면이 점차 흐려지며

스크린이 되었습니다.


시간은 17년 전으로 돌아가 막내 여동생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제 막내만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님은 당신들의 할 일은 다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지요. 

특히나 그날엔 더 힘들어하시는 아버지가 기억납니다. 

딸을 시집보내는 첫 경험은 아들 둘을 결혼시킬 때와 사뭇 분위기조차 달랐습니다.


딸이 기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해주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넉넉한 형편이 아닌 우리 집 상황에 몇몇은 표가 나고 있었습니다.

결혼식장 로비에 늘어 선 화환의 숫자와 보낸 이들의 '유세'는 아버지를 움츠리게 하였나 봅니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늘 상 그런 거에 지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가장 멋지고 우아하게 손님 한 분, 한 분에게 인사하시고 우렁찬 목소리로 로비를 지휘하셨습니다.


결혼식이 다 끝나고 가족사진을 찍고 환하게 웃으시던 아버지가 

이제  다 마무리가 되었다 하실 때에 쓰러지셨습니다. 

정산을 하고 손님들 배웅을 하던 나에게 소식이 전해질 때만 해도,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 상상도 하질 못했습니다. 


119 앰뷸런스로 응급실로 출발하고 며칠간의 시간이 흐를 동안 아버지는

" 나는 괜찮다.. 괜찮다.."만 하셨습니다. 


'대장암 4기'  

" 이미 온몸에 암세포가 전이되셨습니다. 치료는 해 보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

의사의 이야기는 울리듯이 차분하게 우리 가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 아니, 고통이 상당하셨을 거고, 이렇게까지 상태가 안 좋은데 환자 본인은 절대 모를 리 없을 텐데요? "

의사는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까지 아무런 내색 없이 생활하셨다는 것에 의아해하였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을 겁니다. 

하지만 얼마 안 남은 딸의 결혼식에 '어떤 피해가 가지 않을까?'

'당신으로 인해 딸의 결혼식이 망치지 않을까?'만 생각하고 참고 견뎌 내셨던 겁니다. 


그리고  모든 결혼식이 끝나고 '이제 다 끝났다'라는 생각에 고통과 아픔이 

한꺼번에 몰려온 듯합니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전철 안은 다시  환하게 밝아 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곧 내가 내릴 역이 다가오네요.


나이 들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몰라도 생각이 참 많아지고

말은 적어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뜰 앞의 버드나무처럼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움직이고 펄럭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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