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무렵부터 부끄럼을 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친구들 앞에서 이상한 춤을 추기도 하고 망아지처럼 복도와 운동장을 마구 뛰어다녔다. 엄마가 예쁘게 묶어준 머리가 하굣길에는 산발이 되어있곤 했다. 그때 나는 내가 너무 재미있었다. 애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듣기 좋았다. 이름은 분명 좋아하는 사람을 소리높여 부르기 위해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이목이 쏠리면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발표를 하거나 누가 말을 시키면 귀부터 뜨거워졌다. 얼굴이 빨개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 입을 다물고 있어도 얼굴이 붉게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나 너무 부끄러워! 좋아! 혹은 싫어! 하면서.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낸 애는 갑자기 말수가 적어진 나에게 사춘기냐고 물었다. 사춘기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다고 했다. 아니라고 하면 아닌 이유에 대해 또 말해야 했기 때문에, 얘기하다 보면 얼굴이 빨개지고, 빨개지면 무엇이든 들키고 말기 때문에, 대부분의 말에 대충 끄덕였다.
무슨 질문이든지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다음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은 웃음이었다. 내가 잘하는 건 따라 웃거나 따라 우는 것이었다. 그 일에는 이해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헤헤 웃으면 그만이었다. 웃음을 감정을 드러내게 하기도 하지만 숨기는 데에도 좋은 도구였다.
혼자가 편해졌던 무렵부터 귀와 입을 닫고 책을 읽었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야기에 빠져들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잊을 수 있었다. 경계가 흐려지고 나와 타인의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마음이 편했다. 평소 여러 감정을 빠르게 느꼈으나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방주 안에서 어린이를 지나 10대, 20대를 고요히 통과했다.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아 비로소 감정을 이해하게 된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