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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우 Jan 10. 2023

후추

 나는 자주 후추처럼 남겨졌다

  열 살 무렵부터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그 생각은 후추에서 시작되었다. 6명씩 조를 이루어 설탕, 소금, 고춧가루, 식초 등 미각을 건드리는 조미료를 하나씩 가져와야 했다. 수업 시간에 혀에서 맛을 느끼는 위치가 따로 있다는 걸 배우며 직접 실험해보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나는 설탕! 나는 소금! 하고 외쳤다. 나는 아무도 부르지 않은 후추를 가져가게 됐다.

  피구팀을 나누거나 ‘우리 집에 왜 왔니?’ 같은 놀이를 할 때마다 누구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아 나는 자주 후추처럼 남겨졌다. 조원들이 설탕이나 소금을 외칠 때에도 남겨질 하나를 조용히 기다렸다.

  허허로운 운동장을 후추, 후추, 하며 걸었다. 신발을 직직 끌며 흙먼지가 일어나게 했다. 엄마 심부름으로 동네 슈퍼마켓에 가서 아저씨 후추 어디 있어요? 물으면 후추, 후추가, 하며 깊숙한 곳에서 꺼내 주었던 그 후추. 후추.

  후추라는 말이 그날따라 이상했다. 말이라기보다는 부스러기 같았다. 후추라고 말할수록 다른 단어도 이상해졌다. 후추는 왜 후추일까. 후추의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후추가 설탕이 되고 설탕이 후추가 되면 마지막으로 남는 건 설탕일까, 후추일까. 후추. 후추. 건조한 운동장을 느릿느릿 걸으며 후추 생각을 했다.

  후추에게 후추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것 같았다. 후추는 후추라는 이름으로 후추가 되었다. 나는 나의 촌스러운 이름 때문에 조용한 아이가 된 건 아닐까? 시우나 장미 같은 이름이었다면 나도 세련된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 애들처럼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첫 번째로 이름이 불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 단짝 친구가 아니라 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내 이름을 좋아했던 것 같다. 엄마가 건너편 방에서 나를 부르면 내가 거기 있었다. 옥상에 바람처럼 앉아있다가 엄마가 부르면 내가 그곳에 있었다. 슈퍼마켓 아저씨가 잊고 있던 후추를 부르며 찾을 때, 조용히 숨어 있던 후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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