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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우 Jan 10. 2023

파란 마음 하얀 마음

처음으로 시를 쓴 건 여덟 살 여름이었다

  처음으로 시를 쓴 건 여덟 살 여름이었다.




  글은 편안하고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나와 남동생은 아빠가 지켜보는 앞에서 구구단이나 한자를 울면서 외웠다. 시계 보는 방법도 아빠에게 배웠다. 아빠는 식사 중에나 TV를 볼 때 지금이 몇 시냐고 물어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곤 하셨다. 엄한 목소리를 들으면 입에서 쓴맛이 나고 배가 아팠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 밥상 앞에서 눈물 쏙 빠지게 혼날 때도 있었고, 조용히 지나갈 때도 있었다. 주변에는 숫자가 많아서 우리 남매는 자주 겁에 질렸다.
 
  아이들에게는 애쓰지 않아도 쉽게 할 수 있는 일 한 가지씩 주어진다. 남동생은 조립을 잘했다. 생일 선물은 항상 레고였고, 과학 대회에도 몇 번 나갔다. 우리 가족은 남동생이 과학자가 될 줄 알았다. 아랫동네에 살던 어린 진이는 잘 먹고 잘 자서 엄마들의 부러움을 샀고, 동네 친구 은정이는 피아노를 금방 익혔다. 나는 글을 혼자 익혀 책을 읽었다. 글 읽는 것 가지고는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지만, 못하면 혼이 난다. 나는 언제나 혼나지 않는 것으로 만족했다.
 
  우리집 작은 책장에는 어려운 한자가 적힌 아빠의 책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동네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책을 읽었다. 평소에는 자신의 책장을 지겨워하던 애들이 내가 오면 샘이 나서 따라 읽었다. 동네 아줌마들은 엄마에게 전화해서는, 내가 오면 애들이 책을 읽는다고, 나 좀 집으로 보내라고 했다. 엄마는 그런 연락을 몇 번 받더니 전집을 네 세트나 사주었다. 동화, 역사, 사자성어, 백과사전이 골고루 구성된 전집이었다. 나는 동화를, 남동생은 백과사전을 좋아했다. 전집은 전부 유광 하드 커버였다. 책은 낡고 오래된 가구 사이에서 흑백사진 속 유일한 컬러 사진처럼 생생했다.
 
  번쩍번쩍한 전집을 선물 받았음에도 가장 좋아한 책은 예림당에서 1984년에 출판된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라는 동시집이었다. 엄마는 뉴코아 쇼핑센터에 갈 때마다 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서점에 들러주었다. 그곳에서 <모래알 고금>이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같은 동화책을 골랐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코디나 포푸리 만드는 방법이 적힌 책을 살 때도 있었다. 어떤 책은 살구와 분홍의 색감이 예뻐서 골랐는데, 한참 후에야 성교육 만화책이라는 걸 알았다. 그 책을 사달라고 했을 때 엄마의 표정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었다.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건 바로 난처한 표정이었다는 걸 책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 함께 알게 되었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도 뭔 책인지 모르고 골랐다. 글이 짧고 노래 같았다. 엄마는 그게 시라고 했다.




 
  어릴 때 살던 문원동은 사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집과 논이 나눠져 있었다. 왼쪽에는 동생이 만든 레고 마을처럼 집이 규칙적으로 모여있었고, 오른쪽은 전부 널따란 논이었다. 여름마다 개구리가 논 사이에 숨어서 밤새 울어댔다. 심심할 땐 대야에 개구리알을 담아와 동생과 가지고 놀았다.
  논이 끝나는 지점에는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매봉산이 솟아 있었다. 그 산이 혼자 푸르렀다가, 붉었다가, 하얗게 되었다가, 앙상해지는 모습을 의아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시집과 산을 번갈아 보던 어느 날, 앞산의 사계절이 담긴 시를 썼다. 감나무, 팩스, 라디오, 귤껍질을 까주는 외할머니, 남동생의 미움과 귀여움,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 엄마 냄새, 불개미, 혼자 시간을 보내는 옥상, 밤마다 좁은 집에 울려퍼지던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도 시로 썼다. 그때 나에게 ‘시’란, 자주 마주치는 존재에서 예쁜 부분을 찾아, 닮은 무엇인가와 함께 짝을 맞추어 갈피처럼 빈 공책에 끼워 넣는 것이었다.
 
  엄마가 윗동네 중학교 오빠에게서 얻어온 얇은 줄 공책 하나를 다 완성했을 때, 아빠에게 보여줬다. 그즈음 친구가 준 강아지가 회충을 토한 일이 있었다. 호통치는 아빠 목소리에 나는 회충을 맨손으로 잡아서 버렸다. 곧바로 1km 정도 떨어져 있는 친구 집으로 걸어가 강아지를 돌려줬다. 아빠가 무서워서 회충도 손으로 잡고 친구가 나에게 실망할 것도 개의치 않았는데, 시를 건넬 땐 왠지 무섭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건넨 공책을 펼쳐 말없이 읽더니, 계속 쓰면 시집을 내주겠다 하고는 자리를 떴다. 아빠가 앉은 자리에 두고 간 노트를 보며, 아빠를 귀찮게 했는데 혼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 동시집은 지금도 책장에 꽂혀있다. 13살 여름방학에 엄마와 남동생의 손을 잡고 아빠로부터 도망치듯이 외할머니 집으로 향할 때, 그 책을 옷보다 먼저 가방에 넣었다. 마음에 드는 시에 구름 모양을 그려 넣었던 여덟 살 때의 흔적을 버리지 않고 온 이유는 뭘까. 처음 시를 쓰고서는, 시가 적힌 공책을 넘겨볼 때의 종이 소리와 오후의 미지근한 햇살이 가끔 떠오른다. 그때가 여향처럼 남아, 무언가를 자꾸만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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