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쓰고 싶다. 행복하다는 눈부신 확신이 들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상에서 대수로운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이 시공간의 감촉과 질감을 빠짐없이 활자로 기록하고 싶은 욕구가 일고, 손가락 끝이 아리도록 잔뜩 쓰고 싶어진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평범한 나날에 쓰고 싶은 이야기가 가장 많이 생긴다. 종종 불안과 걱정이 지나친 나머지 가벼운 우울감으로 빠지곤 하는데, 그런 와중에도 무언가를 쓰고 싶다고 생각은 한다.
처음에는 핸드폰으로 글을 썼다. 액정화면에 얼굴을 묻고 엄지손가락으로 자음과 모음을 뒤적였다. 주로 잠들기 전이나 출퇴근 중에, 약속 시간을 기다리는 중에 썼다.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유로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다. 쓰는 동안 잠이 오기를, 버스가 오기를, 친구가 오기를 기다렸다. 무언가를 기다린 만큼 글은 켜켜이 쌓여갔다. 함께 하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그 시간을 글로 옮기며 사랑하는 이를 한 번 더 만났다. 그의 웃음소리에 밑줄을 긋고 그 해사함을 따라 적었다. 글 속에서 그의 맑은 얼굴과 입꼬리와 우리 사이로 흘러드는 햇빛을 더욱 선명하게 느꼈다.
산문 같은 소설과 소설 같은 시, 그리고 일기 같은 산문을 썼다. 무엇을 시라 하는 줄도 모르고 소설의 구성 따위도 모르고 내키는 대로 썼다. 마음대로 쓰는 동안 인생에서 벌어지는 우연한 일들을 조금이나마 환대하게 되었다.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도 있고, 사실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일도 있다. 어쩌면 백 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쓰다 보면 내가 나이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게 깨달아졌고, 다른 이를 사랑하라고 주어지는 일이 아닐까 했다. 소화하는 데 오래 걸릴수록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의지와 힘이 되어 주었으니까. 평범한 일상 뿐 아니라 인생에서 겪는 상투적인 실패와 우울과 만남과 헤어짐 전부에는 나만의 고유함이 배어 있다. 나뿐 아니라 개개인에게는 세상 하나뿐인 고유함이라는 게 있고, 그러한 사실에 눈이 뜨이자 다름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람 한 명 한 명이 보존하고 지켜야 할 습지나 멸종 위기 생물처럼 보였다.
망한 것 같은 인생을 그저 쓰며 버티기도 했다. 졸업 후 첫 직장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행하는 서적을 디자인하는 회사였다. 직원은 사장과 나 둘이었고, 사장은 회사 규모가 조금이라도 커 보이려고 실장 명함을 파서 영업을 다녔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여기에 기록하지는 않으려 한다. 첫 직장이 중요하대. 사수가 중요하대. 친구들 사이에 이런 말이 돌았다. 누가 봐도 내 첫 직장은 망한 것 같았다. 처음은 한 번뿐인데, 이직해도 여기가 나의 첫 직장인데, 뭘 어떻게 해야 상황이 지금보다 나아질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두엄더미처럼 쌓인 울적한 기분을 뒤로하고 어두운 방에서 글을 썼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대해, 내 이야기가 아닌 가상의 인물에 대해 썼다. 매일 따뜻한 식사를 하고, 외롭지 않고, 오래된 경험으로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단편 하나를 완성하면 충일감에 숨이 쉬어졌다.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 없다고 하는데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때 나는 글을 쓰며 낙원 근처에 있는 오두막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될 때마다 썼다. 그러면 겨우 나아졌다. 글이 상황을 해결해준 건 아니었다. 상황이 바뀌면서 살만해졌을 뿐이다. 그 후로도 살만해지면 안 썼고 살아가는 게 벅차면 다시 썼다.
쓰다 보면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생각이나 보지 못했을 시선 같은 게 새어 나왔다. 썼다기보다는 발견했다는 게 더 분명한 표현일 것이다. 쓰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생각의 별자리를 발견하는 일이 즐거웠다. 그런 게 없더라도 단어와 문장이 쌓이는 과정이 좋았고, 그러다 우연히 글 한 편이 남으면 그게 퍽 위로되었다. 파티 후 테이블 위에 남은 조그마한 조각 케이크처럼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마음이 달았다. 그렇게 남은 글들은 내 왜소한 우주의 천체가 되어 주었다. 내가 쓴 글은 글이 지닌 가치와는 무관하게 나의 지문 같고, 들숨과 날숨 같고, 정성껏 길러온 화초 같다. 글로 남겨놓으면 그 순간을 영원히 붙잡은 걸 성공한 기분이 든다.
‘잘 쓰고 싶은 마음’ 때문에 ‘쓰고 싶은 마음’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못 쓰는 날이 더 많지만,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만큼만 쓰려고 한다. 애쓰지 않으려고 한다. 날마다 뭉근한 기운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