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 후 EBS에서 방영하는 금요극장을 보기 위해 젖은 머리는 물기만 털어내고 스포츠센터를 나와 빛의 속도로 아파트 1층에 들어섰다.
앗!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 지금 엘리베이터 기절한 거임???
촌각을 다투는 계산된 갈등이 머리를 스쳤다. ‘기사가 올 때까지 기다려?’
‘빨리 26층까지 올라가?’
시계를 보니 오늘은 영화를 보며 불금을 즐기긴 이미 글렀다.
꽁지머리 라이더가 배달시킨 음식을 들고 육두문자를 남발하며 비상계단을 오르는 걸 보니 왠지 겁이 났다. 30년을 넘게 살아온 남자한테 무서우니 13층에서 만나자고 SOS를 했더니 고작 하는 말이 내일은 출근도 안 하니 옆 동에 사는 처제 집에 가서 푹~ 자고 오란다.
양반집 마님이 외박은 할 수 없다는 다부진 각오로 한 계단씩 오르며 가상 시나리오를 나열했다. ‘지진이나 화재가 발생하면 계단을 이용해야 하니 이참에 체력을 단련하자’, ‘하체 근육을 키우는 건 계단 오르기가 최고지’라고 위로하며 층수를 보니 겨우 7층이라 부아가 치밀었다.
계단에 세워둔 그놈의 자전거는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왜 하필 이 시간에 승강기는 고장 나고 GR인지~ 오늘따라 수영은 왜 이렇게 많이 해서 다리는 무거운지~ 온갖 탓을 실컷 하고 나니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모로 누워 TV를 보던 남자가 머리카락이 땀에 쩔은 내 몰골을 위아래로 훑더니 큰 소리로 웃는다. 나는 그 화상을 발로 차는 시늉을 하며 귀가하지 않은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