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이 불교 철학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불교의 가르침을 형상화한 소설을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영화는 대부분 유명한 선사의 일생을 담고 있어 쉽게 공감할 수가 없습니다.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책은 이런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있네요. 청소년과 함께 하는 불교 철학 공감 수업을 이 책으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왜 [반야심경]에 반해 미쳐버렸을까요. 불경을 읽는 건 출가를 하여 머리 깍고 중이 되는 것처럼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라 여겨졌었는데 도올 선생이 청년 때 이 불경에 반해 미쳐버린 이야기를 들어보면 심오한 법어가 아주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어려운 법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니 입산(入山)하여 머리를 깎은 듯 나 자신이 환골탈태한 듯 달리 보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은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고스란이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 가르침을 거듭 반추하면서 뜻을 곱씹어 보느 것이 곧 禪(선)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禪(선)'은 참 복잡하고 어려운 뜻을 담고 있어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불교 계파가 크게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나뉘는데 교종은 이론, 교리 중심이고 선종은 참선, 수행 중심으로 일단 가볍게 이해하도로 합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경전을 많이 읽는 공부가 중요할까요? 아니면 사색과 수행이 더 중요할까요? 이 정도로 이해해도 되겠지만 불교 역사를 들추어보면 참으로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 황제 때 불교의 교리가 정립되고 부처상이 통일 확정되었습니다. 통일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세워야 했으니 불교 이론이 정리되고 섬기는 부처상이 하나로 통일되어 나갔던 것입니다. 이런 통일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귄력화의 폐악이 나타날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온 새로운 교파가 선종입니다. 진정한 깨달음과 탈권력을 주장하는 선종 종파에서 생산된 경전이 '금강반야바라밀다경'입니다. 이 경전의 핵심 가르침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입니다.
불교의 한 종파 선종의 스승 달마대사의 가르침은 유교의 스승 공자, 기독교의 스승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뭘 모를 때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다.
지혜가 열리니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더라.
깨닫고 다시 보니 산은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다."
금강경 해설서<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언급된 말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금강경의 가르침과 공자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기 주관이 생기기 전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그러니 산은 산이고 물은 그냥 물인 겁니다. 자기 주관이 생긴다는 걸 공자는 '입지(立志)'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관점이 없이 세상을 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관점을 가지게 되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게 됩니다.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됩니다. 공자는 뜻을 세워야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보는 눈이 뜨인 것입니다. 눈이 뜨이면 자기 주장이 강해집니다. 자기 관점에 부합되는 사실을 끌어다 대고, 들어맞지 않으면 무시하거나 배격해 버릇해 점점 고집이 세지고 말지요. 이렇게 되면 관점이 오히려 사물 보는 눈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때부터는 자기 주관을 벗어버리기 위한 내면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내면의 갈등이 깊어져 비로소 자신을 해체하기 시작하면, 자기 주장보다 세상의 섭리에 귀 기울이고 남의 얘기에 섣불리 자기 생각을 끌어대어 견주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어렴풋이 천명(天命)을 알게 되고 이순(耳順), 귀가 순해지는 겁니다. 성경에도 이런 취지의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가 많으면 걱정도 많고 지식을 늘리면 근심도 늘기 때문이다." (전도서 1장 18절)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늘 나라가 저희의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절)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 3장 18절)
전도서는 지혜의 왕 솔로몬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가 그 지혜를 고통의 근원이라고 말한 겁니다. 공자의 말씀이나 불교의 깨달음, 성경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는 걸 어렴풋하게 알 것 같습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봅시다.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하는 번뇌를 크게 3독, 5욕, 7정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 수행을 크게 6바라밀로 정리합니다. 이 어려운 법어들을 어린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는 일이 가능할까요. 수행 정진의 한 방안으로 바라밀 스토리텔링을 펴 보려고 합니다.
3독은 탐진치(貪瞋痴)곧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5욕은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색욕(色慾)
재물욕(財物慾),명예욕(名譽), 다섯 가지 욕심을 말하고
7정은 희(喜기쁨) ,노(怒분노), 애(哀슬픔), 낙(樂즐거움), 애(愛)사랑), 오(惡미움), 욕(欲욕망),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합니다.
유학에서도 인간의 마음씨를 사단칠정(四端七情)으로 설명했는데 유학에서 말한 칠정은 반야심경에서 말한 7정과 같은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5욕이 충족되느냐 결핍되는냐에 따라 이 7정이 발한다고 보는 겁니다. 쉽게 얘기해서 5욕 7정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그에 따른 심리적 반응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더불어 살면서 동물과 다른 심성을 갖게 되었는데 유학에서는 그 인간다운 심성의 씨앗으로 사단(四端)을 얘기했습니다. 사단은 인간의 선(善)한 마음씨의 단초(실마리)를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정리했는데 인(仁)은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한 것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의義 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잘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하거나 미워하는 마음, 예(禮)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양보하는 마음, 지(智)는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더불어 살면서 이런 착한 마음씨를 갖게 된다고 하는데 동물 중에서 왜 인간만 이런 마음씨를 갖게 되었는지 참 신기합니다. 사회진화론에서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높은 지능을 갖게 된 결정적 요인을 '공동 육아'에서 찾았습니다. 동물은 자기 유전자를 보존 확산시키기 위해 혈육에 대해 배타적 애정을 가는다는 '이기적 유전자 이론'으로는 인간이 갖는 이타적 심성의 위대성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갖는 이타적 심성은 인간을 동물 중 가장 발전된 종으로 진화하도록 만든 결정적 요인이라는 겁니다. 불교는 이미 이 진리를 고대시대부터 설파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음니다. 불교 경전 반야심경에서는 이타적 내려놓음, 보시에 대해 6바라밀로 정리했습니다.
6바라밀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선정(禪定),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여섯 가지 선행을 말하는데 그중 으뜸은 보시입니다.
보시는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 셋으로 나누었는데 재물, 법어, 미소를 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물질적 이익을 주는 것, 가르침을 주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것 '무외' 즉 '두려움 없음'을 주는 게 보시 중 으뜸이랍니다. 두려움, 거리낌 없게 만드는 방법이 뭘까요? 밝게 웃는 얼굴로 대하는 것이랍니다. 누구를 대하든 미소를 띄는 게 보시의 으뜸이랍니다.
인욕(忍辱)은 욕심을 억누른다는 것인데 그 발달 단계를 복인(伏忍), 유순인(柔順忍), 무생인(無生忍), 적멸인(寂滅忍), 4단계로 나누어 수행 단계를 명시하였습니다. '복인'은 한자 뜻 그대로 엎드려 참는 것이고, '유순인'은 유순해진 것이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도로 않도록 하는 '무생'과 말끔히 사라져 고요하다는 '적멸'은 해탈한 경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반야는 깨달음에 다다른 지혜라고 이해하면 되는데 분별지(分別智)인 지식과 달리 무분별지, 지혜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이는 IQ(지능지수)가 분석 능력임에 반해 EQ(정서능력)가 공감 능력임을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