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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Jan 13. 2023

차선의 이론

Movie

경제학 이론들 중 '차선의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A, B, C, D, E의 5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최적인 상황이 있다. 두 가지 상황이 제시되었을 때, 


1.  A만 충족시키지 못한 상황  


2. A, B, D 3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상황


이 두 가지 상황이 있을 때, 단순히 생각하면 1의 경우가 더 최적이라고 고려되지만, 차선의 이론에서는 두 상황 모두 A, B, C, D, E의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별반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아니 오히려 1의 경우가 2의 경우보다 나쁜 상황일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여러 이론들을 봤지만 그중 가장 꽤나 흥미가 생긴 이론이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났다. 주식선택권을 공부하다가 그냥 정말 문득. 그러지 말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의 이름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래서 재정학 책을 뒤적이다 이 문구를 찾았고, '아 그래 맞아 차선의 이론이었지'라고 생각했다. 옆에는 과거의 내가 적은 "불확실한 차선보다 확실한 최선을"라는 메모가 있었다. 보통의 나라면 그렇게 적진 않았을 테지만 뭐 어떤가. 밤늦게 재정학 책을 보며 미래의 성공한 자신을 생각하며 감상에 젖었을지. 아니면 오늘처럼 갑자기 어떠한 생각들이 쉼표도 없이 이어져 그것들이 하나의 멋진 콘체르토를 이루었을지. 그리고 그것의 마지막 악장에 남은 것이 그러한 문구였다면 말이다. 때때로 현실은 영화보다 아름다우니 내가 그 순간 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의 테이크를 촬영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화성학을 무시한 채 무수히 많은 음표들이 피아니시모와 포르티시모를 쉴 새 없이 드나들며 이뤄진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는 쉼표들이었다. 그저 모든 사람들이 평범하게 생각하는 그런 보통의 소나타를 만들면 되었을 텐데, 나는 내가 리스트라고 착각하며, 그렇게 시시한 것은 나 같이 특별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라는 생각을 했었겠지. 그 당시에 그렇게도 아름답게 들리던 그것은, 지금에 와서는 과연 이것을 작곡이라고 할 수 있는지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리스트의 음악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이 세상이란, 제각기 어떤 역 하나씩을 맡아서 연기해야 할 무대이다'.라고 셰익스피어가 말했다. 이 세상이 맥베스라면 난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주인공에 반하며 누군지도 설명되지 않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화살에 죽는 반란군23 정도의 역할일 수도 있으니까.



구두가 빛나기 위해선 구두를 닦아야 한다. 구두를 빛나게 해주는 구두약과 구두를 닦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새것같이 검은 광택이 나는 구두를 위해서 누군가의 옷은 구두약으로 검게 얼룩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소중한 구두라며 잘 부탁한 누군가의 진심 어린 부탁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누군가의 소중한 옷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신사는 멋진 구두를 닦아준 그에게 감사해한다. 신사는 중요한 약속에 긴장한 듯 보이며, 우리는 그가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궁금해한다. 아무도 소중한 옷이 더럽혀진 구두닦이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신사가 멋진 식당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며 행복해하는 장면과 함께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영화가 끝나며 올라오는 크레딧에 비치는 구두는 여전히 빛이 난다. 음표들은 쉼표들과 조화롭게 이어진다. 신사의 이름이 나오며 감독과 배우들이 스쳐 지나가고 리스트의 콘체르토가 자막에 표시된다. 구두를 닦던 누군가의 이름이 나오기 전에 관객들은 자리를 떠난다. 구두를 닦던 누군가는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그의 소중한 옷마저 지키지 못했다. 현실은 때때로 영화보다 비참하니까.



https://youtu.be/bdhLO8dXVu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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