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리가 초3이 되면서 뭔가 말하는 것만 들으면 으른같다. 으른 같으면서도 정확히는 사춘기 소녀같다. 인생에 대해서 다 아는 것 같은데 좀 더 파고들면 별 쓸데없는 구분을 짓고 있다. 지난 주 일요일 드디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중단했던 주말 데이트를 재개했는데, 아이브 앨범 "럭드"를 위해 여의도 더현대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럭드가 뭐야?"
"응 포카 럭키 드로우"
"포카는 뭐야 포카칩이야?"
"포토 카드"
새로운 줄임말이 많다. 켈리 덕분에 지하철역 출구도 "강남역 5번 출구"라고 안하고 "5출"이라고 줄여서 말하는데 ㅎㅎ 더이상은 새로운 줄임말 생성 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다.
# 10.15 1차 시도 실패
어쨌거나 켈리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우리는 더현대로 갔다. 한 오후 3시쯤 도착했는데, 글쎄 웨이팅이 완료되었고 516팀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녀의 아이브 앨범 럭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나도 예전에 덕질하던 기억을 소환시켜보니 중3 때 HOT를 좋아해서 HOT 콘서트 표를 구하기 위해 폭풍 클릭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때 특유의 허여멀건한 얼굴 덕분에 아프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교실 밖을 나온 다음 같이 갈 친구들과 함께 '개구멍'으로 빠져나와 콘서트에 갔었더랬다. 켈리는 중3 아니고 초3인데 벌써 이런 증세가 나타나지 싶다.
켈리의 말을 들어보니 "사실 아이브 앨범이 중요한게 아니라 포카거든~" "포카가 시세가 있어서 한 장에 150만원 하는 것도 있어! 그거는 지난번 앨범인데 내가 그때는 포카를 몰랐어서 너무 아까워"라고. 포카 시세를 마치 주식 시세 말하듯. 어른인 나에게는 '상술 기막히게 좋다... 마케팅 기법이 참 좋구만!'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초딩생들 포카에 진심인건가 보다. 포카를 실시간 거래할 수 있는 어플이 있을 정도니까.
# 10.18 2차 시도
아침 일찍 켈리의 모닝콜이 다급하게 울려왔다. 사실,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내가 그 시간에 회사를 안 가고 아이돌 앨범을 하고 포카 럭드를 위해 백화점에 간다는 것은. 하지만, 언제나 늘 그렇듯, 주어진 과제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꼭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행동을 요하는 모든 것들에 경의를 표하며,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럭드 웨이팅 장소로 향했다. 길치에 방향치이지만 역시 한 번 가본 곳은 익숙했다. 그래서 지신밟기가 중요한 것이다.
더현대 지하2층 입구에 도달하니, 직원들이 출근하고 있었다. "앗, 이 줄이 아닌가벼" "아이브 앨범 웨이팅은 어디서 줄 서는 거죠?" 약간은 어색하지만 용기를 내어 물어보니 청소 아주머니께서 친절하게 나를 데려다 주셨다. 여기 첫 줄에 줄 선 엄마와 두 아이는 오늘 학교 수업도 째고 오로지 럭드만을 위해 이 곳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내 앞엔 뭔가 오타쿠스러운 아재 한 분이 계셨다.
확실히 "First mover's advantage"가 있었다. 아니, 평일에 백화점 올 수 있는 퇴직자의 advantage! 대기번호 6번을 받고나서는 백화점 문 열고 나서 오라는 안내를 들으니 얼마나 안도감이 오던지. 그래, 나 돈 벌어다 주는 거 말고 럭드 덕질도 대행해 주는 엄마야.
거의 윗동네 장군이 오기라도 할 것처럼 근처 커피숍에서 동향을 살피고 커피를 쓰읍쓰읍 홀짝홀짝 마시며 대기를 탔다. 그러다가 낌새가 백화점 문이 열릴 듯하여 얼릉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진 것 같이 보이는 초딩 모녀를 스윽스윽 미행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운드웨이브가 나타났다. 직원들한테 눈 맞추며 "6번이요!"라고 했더니 나의 간절한 눈빛을 본 직원이 마땅한 6번 자리로 데려다 주었다. 보니까 엄마, 아빠, 첫째, 둘째 모두 출동한 가족들도 있었다. 정말 이렇게 상술에 놀아나도 되나? 이게 말하자면 피카츄빵 띠부실 같은건가??
# 이게 모라고 신나는겨
드디어! 6번의 차례가 왔고, 나는 원래 통이 컸던 것처럼 아이브 앨범 한 셋트 주세요! 라고 했다. 정말 예술적인 상술인게 앨범 4개가 한 셋트여서, 한 셋트를 사야만 폴라로이드 포카 하나 주고, 럭드 기회를 4번 준다. 보니까 앨범 출시 때 럭드를 통해 얻은 포카는 희소성을 가지고 있어서 포카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의 럭드 영상..."딸이 찍어오라고 해서용~" 딱 봐도 딸램 숙제하러 온 초딩맘 티를 팍팍 내고 그냥 팍팍 누르면 되는건데, 이게 어떻게 눌러야 잘 누르는 건지 생각에 가득차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나의 손을 보라. 오늘도 이 엄마의 경험치를 한 끝 더 늘려준 켈리에게 감사. 이미 난 수십억대 경험치 부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