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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은 설명할 수 없다.

by 삽질

24살, 늦은 나이에 두 번째 수능을 치렀습니다. 누나는 시험을 잘 보라며 아주 작은 짚신을 선물해 줬습니다.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기 위해 봇짐에 묶고 먼 길을 떠났던 그 짚신입니다. 시험장에 도착해 그 짚신을 책상 서랍에 가지런히 놓고는 짧게 기도를 했습니다. 시험을 잘 치렀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종교를 가졌던 적은 없지만 항상 중요한 순간에 기도를 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혼자 힘으로 서 있는 게 힘들었나 봅니다. 믿음이 없던 기도는 효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귓가를 울리던 심장소리는 시험이 끝날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매년 수능 때가 되면 그 불안함을 느끼고 있을 수많은 수험생들이 떠올라 가슴이 내려앉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저는 그 시간을 견디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 가끔 아찔한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수능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찰나의 순간에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겠죠.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나이에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시험을 치르는 건 무척 잔인한 일입니다. 중압감을 이겨내고 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때론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요.

스스로의 힘으로 오롯이 인생을 꾸려갈 수 있다는 믿음은 어느 순간까지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시간은 생각보다 짧은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일수록, 수능을 잘 치고 좋은 대학에 간 사람일수록 자신의 한계에 좌절감을 느끼고 불확실한 미래에 더 큰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산다는 건 열심히 문제를 풀고 점수를 받는 수능과는 전혀 다른 게임이니까요. 영민한 사람이라면 금세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살길을 찾기 마련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최선을 다해 풀어가면서 그렇지 않은 문제는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챙깁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불안함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됩니다. 불안감이 높은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입니다. 세상의 절반은 우리의 힘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2010년 꽤 따뜻했던 수능 날, 제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제 심장이 그렇게까지 요동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험 결과가 선명한 미래를 그려줄 수 있을 거란 착각과, 결과와 상관없이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가치 있는 교훈은 비싼 값을 치러야만 배울 수 있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인생을 내 마음대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거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떠드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남을 속이려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속아넘어가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내 삶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근면함과 내가 손댈 수 없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리석은 역사가 반복되는 건 세상을 완벽히 설명할 수 있다는 오만함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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