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독감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제주도에 혼자 다녀왔습니다. 제주도에 살 집을 보기 위한 출장이었습니다. 아침 5시에 집에서 나와 밤 11시에 돌아온 강행군이었습니다. 선택해 놓은 6개의 집을 차례로 돌아봤고, 고민되는 두 집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혼자 결정하지 못한 채 돌아왔고 집에서 아내와 얘기를 나눈 후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아직 처리할 내용이 있어서 다음 주까지 상황을 봐야겠지만 어쨌든 집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습니다.
화창하고 따뜻했던 제주도는 쉽게 눈에 담기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독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집을 보러 다니면서 마음이 더 심란하고 무거워졌습니다. 여러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주도의 집들을 둘러보는데, 자꾸만 지금 살고 있는 집, 편안한 환경과 비교를 하고 있더군요. 여기는 이래서 별로고, 이건 조금 더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나 환경과는 전혀 다른 제주도의 어떤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갑자기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집을 누군가에게 빌려주는 것도 싫었습니다.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거면 그냥 지금 사는 집에서 사는 게 속 편하고 가장 안정적일 텐데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는지 순간 헷갈렸습니다. 지금 하는 선택이 나중에 후회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변화에 순간에 찾아오는 당연한 고통 같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변화는 설렘과 불안함, 기대와 걱정을 함께 가져오니까요. 가장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는 지금, 갑자기 큰 변화가 생기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막연한 불안감이 무척 불편했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불현듯 정답이 찾아오곤 합니다.
물이 가득 찬 잔에는 더 이상 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저는 물이 가득 찬 잔에 더 많은 물 담으려고 애썼습니다. 흘러내리는 물을 보며 발을 동동거렸습니다. 다 내 것인데, 모두 내가 가지고 싶은데, 내 것들이 내 손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하고 속상했습니다. 저는 어느 것 하나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해선 먼저 그릇을 비워야 합니다. 그릇을 비우는 과정은 고통스럽겠지만 다른 것을 채우려면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저는 새로운 것을 담기 위해 지난 것들을 비워야 하는 과도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내려놓지 못하는 욕심과 갖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괴로워했습니다.
내 집을 아무에게 빌려주기도 싫고, 제주도에서 가장 싸면서 지금을 혜택을 모두 갖고 있는 집에서 살고 싶고, 교사라는 직장의 안정적인 수익을 갖고 싶으면서, 전혀 새로운 일에도 도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려놓는다는 건 잃는다는 말과 다릅니다. 내려놓더라도 전부 제 안에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간 옆으로 치워놨던 것들을 다시 제 그릇에 다시 담아야 하는 날도 올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이치를 받아들였을 때 제 마음도 안정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제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갖고 살았는지도 깨달았습니다. 얻는 것보다 이제는 잃을 걸 먼저 생각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먹을수록, 가족이 생기고 가진 게 많아질수록 변화를 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보단 가진 걸 잃지 않는 편에서 더 쉽게 행복을 느낄 테니까요. 젊은이들이 도전에 주저함이 없는 이유는 가진 게 별로 없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마음만은 아직 청춘이라는 말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의식하고 노력해야만 도전이 가능한 나이가 됐다는 걸 실감합니다.
가족과 떨어져 처음으로 먼 곳을 혼자 다녀보니 외롭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겁 없이 인도 같은 나라도 혼자 곧잘 여행 다니던 사람인데, 참 많이 변했습니다. 온전히 제힘으로 짊어오던 짐을 아내와 함께 많이 나누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은 반쪽짜리 생각이고 제 용기는 반쪽짜리 용기가 됐습니다. 희한하게 우리가 함께 하면 하나보다는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가족 없이 저를 설명하기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나약해진 제가 한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우리'가 좋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담을 이야기를 위해 가득 차 있는 '제' 잔을 부지런히 비워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