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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Mar 18. 2016

연어의 태도

 역시 태도의 문제구나, 깨닫는다

연어가 맛있는 거 같아. 생선회 코너의 포장된 회를 고르면서 말했다.  

그래서 남편이 연어 한 줄, 광어 한 줄이 포장된 회를 골랐는데, 그렇게 말해놓고 막상 연어는 몇 조각 먹지 못했다. 야심 차게 달려들지만 매번 의욕만큼 먹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좋아하고 싶은데 맘처럼 되지 않는 애매한 인간처럼.     


광어나 우럭 같은 흰 살 생선들은 항상 생각대로의 맛이다. 질리는 시점도 예상이 된다. 단단하고 고소하고. 똑똑 끊기는 꼬득하고 반듯한 맛.   

하지만 연어는 맛을 보는 순간 항상 예상과 약간 다르다.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날은 말 그대로 입안에서 녹아 내리며 부드럽게 사라지는데, 어떤 날은 느끼한 기름이 미끈, 거리면서 비위를 건드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얌전하고 부드럽고, 나긋나긋하면서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연한 살구색 때문인지 만만하게 보게 되는데 그게 싫은가 보다.   

회 먹자! 우악! 하고 한 접시 쫘악 멋지게 펼쳐지는 우럭이나 광어처럼 대접받고 싶은데 그렇지 않아서 신경질이 나는 건지.  

초밥 집에서 연어 위에 마요네즈와 양파채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자존심이 상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차돌박이구이 초밥과 같은 취급을 하다니, 하면서 분해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주변에서는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는 나의 모습과 사람들이 실제로 보는 모습에 간격이 있다. 그 차이를 실감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하고 혼자 그렇다고 최면을 걸듯이 버티다가 그 그룹을 떠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봤고,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시골에서 올라와 성공했건만 누군가가 여전히 자신을 어렸을 때의 봉식이, 숙자로만 보는 것에 대한 답답함. 나를 아는 사람들을 떠나 환골탈태한 채로 새롭게 인정받으며 살고 싶은 마음이 누구라도 없을까.    


거꾸로 나는 새로운 사람들 틈에서 쉬이 인정받지 못하자 인정받으려고, 어쩌면 적어도 눈길을 끌어보려고 몇 개월 동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행동을 한 적이 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은 그때 왜 그랬어? 하고 놀리곤 한다.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그런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지 실제 내 모습이 아닌데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이 봐주기를 바랬다. 살다 보니 기어코 원하는 대로 보아 지는 사람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SNS에는 맘에 들게 나온 사진과 적당히 예쁜 글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진짜 삶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심하게는 보정한 사진과 일상이 자기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모두 정도의 차이지만 조금씩 왜곡하고 은폐하면서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미묘하게 또는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그 과정을 감지하고 사람들은 거부하거나 비난하기도 하지만, 꾸준히 어필하는 이들에게 어느 샌가 동조하는 반응을 볼 때마다 놀라기도 한다.     

“엄마는 미인이 아닌데도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이건 내가 엄마에게 배운 것 중에 하나인데, 남자의 관심을 끌고 싶다면 결국 문제는 미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미인처럼 처신하느냐 아니냐 라는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처신했다.” <수박향기>    


그렇다. 어떻게 처신하는가, 가 결국 문제이다.     

가엾은 연어.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건만 어쩌다 새침한 깍쟁이처럼만 보이게 되었을까?  

좀 더 화끈하게 처신해보는 게 어때, 등에다 마요네즈 같은 거 얹지 말고.    

하지만 ‘사케동’이란 이름을 달고 생강과 함께 아주 두껍게 썰려 밥 위를 덮고 있는 걸 보면 박력 있게 보일 때도 있다.     


실제로 어떠한가의 문제를 떠나,   

역시, 태도의 문제구나,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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