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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Apr 01. 2016

바나나가 주는 평안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안을 주는 과일도 있는 것이다.

바나나를 사두면 마음이 든든하다.

식량을 구비해둔 느낌.


심지어 오늘 아침엔 급하게 외출을 하면서 바나나가 있는 것을 한번 보고 나가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는데 안 먹은 거다, 라고 생각하니, 괜히 뱃속이 든든했다. 먹든 먹지 않든 보는 것만으로 포만감이 느껴진다.

평안.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안을 주는 과일도 있는 것이다.


이런 평화로운 과일이 전혀 평화롭지 않은 사태를 야기한적이 있다. 잠시영국에 있을 때, 다니던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를 했었다. 간식으로바나나 1개씩이 나왔는데, 영국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 한명이,

“이건 멍키가 먹는 거야 나는 안 먹을 거야”

라며 간식을 거부했다. 그 아이가 세 살이었나, 네 살이었나, 아무튼 보통 그 때는 울다가 사탕 껍질만 봐도 입에넣을 거라고 알아보고 울음을 그치는 나이 아닌가? 비단 아기가 아니어도 그 시절의 나는 돈을 아낀다며 버스도 안타고 한참을 걸어 교회를 가던 시절이라 바나나라니 좋겠다, 라고 생각한 간식을 마다하다니, 아니, 그것보다 사람들 먹는 것만 보면 쪼르르 달려가 두 손을 포개고“나도 좀, 나도 좀” 그래서엄마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나의 어린 시절과 달리 이유를 대며 먹을 것을 거부하는 어린 아이의 의사 표현에 스물 두 살의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멍키가 먹는 것이라는 말에 줄 서서 기다리던 아이들 중에는 따라서 안 먹겠다는 아이들이 생기고, 어떤 아이는 실랑이 같은 것도 벌이고 그래서 아니야, 맛있는 과일이야, 라고 어르고 설득하던 선생님들까지,,가장 즐거워야 할 간식시간이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오, 평화의 바나나가 이런 사태를 불러오다니!


아이들은 가끔 당황스러울 만큼 직설적이다. 내 덧니를 보고 “이빨이 왜 그래요?” 라고 묻는 아이 앞에서 나는 무력하다. 아이가 큰 소리로 말하자 못났다고 한 것도 아닌데 마치 모두가 쉬쉬하던 비밀이 발각된 것처럼 민망했다. 아이를 안으려고 할 때 싫다고 울면 머쓱해지고, 절대선에게 거부당한 느낌이랄까, 괜히 부끄럽다. 그래서 ‘멍키가 먹는 바나나’라서 먹을 수 없다는 아이의 선언이 대수롭지 않은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새롭게 등장한 진실처럼, 어른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얌전했던 친구들이 함께 반란을 도모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거부당한 바나나를 스타벅스에서는 개당 1,500원에 팔고 있다. 3천원이면 스무 개 정도 달린 한 송이를 살 수 있는데 1,500원에 누가 살까 싶겠지만 나도 두어 번 사 먹은 적이 있다. 한번은 아침 일찍 약속이 있어 커피숍에서 기다리는데 허기가 졌다. 밀가루는 먹기 싫고 뭔가 간단히 먹고 싶은데, 마침 계산대에 바나나가 있다. 커피하고 한 개 어때? 라고물으면서. 그래도 1,500원 주고 한 개는 좀 그렇지 않니, 하고 발을 빼면서 고민하면,

“뭉치로 있는 놈들이랑은 역시 좀 다르지?” 라는 풍채를 한 알이 굵고 튼실한 바나나가 제 값은 하겠다는 듯이 다시 나를 바라본다. 그래, 에잇, 하고 집고만다.

그래도 비싼 샌드위치보다 싸게 배를 채웠어, 실속 있었어, 라고 위로도 하고 타협도 한다.

(거참, 바나나 하나 먹으면서혼자 만담을 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보고만 나갔던 바나나들도 역시 실속 있게 먹고 마무리 되었다.

우유에 바나나와 냉동 블루베리를 넣고 쉐이크를 해서 먹었다. 음료지만 한 컵을 다 마시면 밥 먹은 것처럼 배가 부르다. 상하기 쉬운 바나나를 이렇게 한 개도 버리지 않고 성공적으로 다 먹으면 한번 더 뿌듯해진다.


제대로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음식이 많은 나에게 바나나는 정신 건강에 좋다.

물론 아침을 잘 못 챙기는 나에게는, 몸 건강에도 좋다.

늦은 밤, 느닷없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라면을 먹을까 하다가 눈앞의 바나나 하나를 분질러 먹고 넘긴 것까지 치자면, 그야말로 여러모로 내 인생을 평온케 하는 평화의상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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