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양파를 같이 먹는 것만큼 인생의 밸런스를 맞추는일도 쉽다면 좋을텐데
어묵을 볶든, 감자를 볶든, 오징어를 볶든 양파를 함께 볶는다.
양파를 먹으면 피가 깨끗해지고 맑아졌을 거라고 믿는다.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기름을 두르면서도 양파와 마늘과 파를 넣으면서 조금 안심한다.
양파가 밸런스를 잡아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한다.
최근 내가 관심을 두는 문제가 있다면 “밸런스”를 맞추는 것에 대한 것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균형, 의지와 기대 사이의 균형, 현실과 목표 사이의 균형에 대한 것 말이다.
학생 때는 나에게 공부만 열심히 잘해 주기를 바랬다. 하고 싶은 것이나 꿈이 있어서 열심히 달려가기만 해도 격려와 응원을 받는 느낌이었다.
잘해라, 힘내라, 꿈을 향해 나가라.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자라는 새싹이 아니라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 자신에게 그 열매를 내어 주지 않더라도 아직도 열매가 없는 나무는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책을 출판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있는 순간에, 사람들은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긴 한 것인지 묻는다. 얼마나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공유 불가능한 내 것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얼마나 버는데, 라고 묻는다.
20대는 사랑을 위해, 연애를 위해, 공부를 위해, 직장을 위해, 처음 접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모두가 고군분투한다. 힘들지만 가능성이 있었고, 꿈을 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그저 사회에 적응하는 것조차 응원 받았다.
그런데 30대가 된 이후로는 ‘열심히 하는 것’, ‘잘하는 것’ 은 기본적인 조건이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밸런스를 맞추며 가는 것이었다. 결혼한 상대와 발 맞추며, 내 주위와 발 맞추며, 가야 한다. 남자들은 직장만 열심히 다니면 되는 시대가 아니다. 퇴직할 때까지 열심히 일만 하고 돈만 벌어오면 자신을 노고를 존경하고 위로해 줄 줄만 알았던 아내와 자녀들은 자신을 어색하게 여기고 함께 집에 있는 것을 오히려 불편해 한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다들 커서는 제 갈 길을 가고 엄마는 집에서 노는 사람, 당연히 집에 있는 사람 취급을 한다. 엄마는 항상 엄마. 그래서 엄마 역할에 충실했음에도 내 손에는 남는 게 없는 것 같다. 공허하고 허무하다고도 한다.
다들 제 할 일을 열심히 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알아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가, 아빠가 되어 보지 않은 아이들이 그런 감정을 이해할 리 만무하다.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20대 때부터 열심히 살아온 어떤 자아가 아니라 처음부터 엄마고 아빠다. 기본적으로 열심히 해야 할 것들을 하면서 아내와, 남편과, 가족과, 일과 가정의 밸런스도 가꾸고 맞춰야 한다.
나 역시 그런 것들이 내 주위로 슬금슬금 모여들면서 나를 긴장시키고 내 삶을 바꾸려고 하는 것을 느낀다. 글만 열심히 쓰면 안 된다. 나 하고 싶은 거 하겠다고 모든 짐을 남편에게만 지울 수는 없다. 돕기로 한 남편 회사의 일을 하고 글을 쓴다. 회사 일이 많은 날은 힘들어서 몸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도 글쓰기 모드로 전환이 잘 되지 않는다. 아예 앉지 않는 날도 있다. 한참을 앉아 있어서 조금 쓸 수 있는 모드가 되면 잠 잘 시간이다. 집안일도 해야 하고 밥도 해먹어야 한다.
결국 이런 모든 것이 핑계일까?
직장에 다니며 주말에 소설을 쓰는 사람들도 있고, 짧은 시간에 제대로 된 글을 완성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공부하느라 힘든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넌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잖아” 라고 말하는 말의 뜻을 조금 알겠다. 자신이 할 일에만 집중해서 하면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여유”인지, 빡빡한 학업에 잠도 못 자는 학생들이 들으면 “여유라고?” 하겠지만. 정말 그런걸. 조금 더 지나면 우리는 자기 일만 잘해가지곤 안된다.
균형을 맞추려고 저울을 살펴보다가 저울 안에 들어있는 것부터 다시 고민하게 된다. 엄마들은 우는 아이를 뒤로 하고 일하러 나가면서 내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있나 죄책감과 의구심에 싸여 아침마다 고민한다.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것인지 상사의 공적을 쌓아주기 위해 야근하는 것인지 구분이 점점 모호해진다. 내 일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인지 학부모를 상대하는 것인지 선생님, 하면 떠오르는 직업의 할일 보다 몰랐던 잡일이 더 많다. 점점 더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면서 혼란스럽다. 시간이 지날수록 젊음이 내 뒤로 지나쳐 가는 것 같을수록, 이제 더는 기회가 없을 것 같고, 늦어 버릴 것 같아서 항상 기회비용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걱정하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 생긴 역할도 많아졌다.
잘해내야지, 궁리하며 사는 것만큼 정신적으로 밸런스를 맞춰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어묵만, 고기만, 햄만 골라 먹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의식적으로 양파를 함께 집어 먹는다.
아무거나 맛있게 잘 먹기만 하면 응원 받는 때를 지나 스스로 건강을 지켜야 할 나이가 되었으니까.
그저 양파를 곁들여 먹는 것만큼 인생의 밸런스를 맞추는 일도 쉽다면 좋을 텐데.
아직은 하고 싶은 것이 햄과 고기처럼 분명한 나는 저울의 건너편에게 무게를 실어 주는 것이 쉽지가 않다. 볶아진 양파의 달큼한 맛을 알게 되었는데도 추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남보다 늦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은 사람들은 조금만 더 열심히 해 볼 기회만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원하는 추에 가진 무게를 온전히 다 싣고 싶은 마음은 철없는 욕심 같기만 하다.
선택한 것들을 책임지지 않는 철부지도 싫고, 기회도 지원도 없다고 징징대며 포기하는 불평도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계속해서 고군분투 해야 하겠지만, 돌아보면 모두가 그 비좁은 틈에서 힘을 내고 있다. 분투해봐야지.
올해 나의 목표는 멘탈이 강한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