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님 GV의 정경들
지난주 옆동네 도시에서 무슨 영화제가 있었고 그 영화제의 마스터 클래스에 이창동 감독이 오셨다. 표도 없이 극장을 찾아갔는데 (매진이었거든요) 다행히 GV는 볼 수 있었다. 한 시간가량의 대담(<버닝>의 시나리오 작가가 진행을 했다)과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그때 들었던 몇 개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1. <초록물고기>(1997)와 <박하사탕>(1999)을 만들게 된 계기
영화감독의 말은 가려 들어야 한다. 그냥 하는 얘기와 속사정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 하지만 그날 감독님의 말에 의하면, <초록물고기>는 일산으로 이사를 간 감독님이 신도시가 들어서는 걸 보면서 '여기서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같은 동네에 살던 여균동 감독, 문성근 배우와 백마역 앞에서 차를 마시다가 문득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고는 '이 동네 살던 청년이 군대에 갔다가 기차를 타고 돌아와 신도시로 변해버린 동네와 마주하는'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고. 원래 그 자리는 여균동 감독의 차기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이었는데 엉뚱하게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인생은 알 수 없다.)
<박하사탕>은 40대를 넘어선 어느 날, 면도를 하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결코 내가 원하지 않았던 얼굴이 되어 버린 자신의 얼굴과 마주한 감독님이 20살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되었고 그게 영화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간의 소중함, 시간이 아깝다는 사실을 젊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거 혹시 부장님 마인드 아닌가요.)
2. 질문: 본인의 영화가 리얼리즘 영화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소감은?
'리얼리즘은 총체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고 리얼리즘은 아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현실을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이를 통해 앞으로 현실이 더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봤을 때 내 영화는 리얼리즘 영화다'라고 말했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본다는 것. 개선할 여지가 있으며 더 좋은(옳은)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진보적 시점이 아닐까 싶다. 보수적 관점은 지금이 좋으니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는 게 낫다고 보는 거라면 진보적 관점은 지금이 별로니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너무 단순화시키긴 했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은 늘 시끄럽다. 만족을 모르고 불평불만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국가나 사회, 공동체가 해준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고 욕먹는다. 하지만 완벽한 사회란 없으니 완벽으로 향하는 길도 나쁘지는 않다.
보수적 관점이 단순히 지금이 좋으니까 유지하자는 걸 말하는 건지, 귀찮아서 (혹은 매너리즘으로) 지금 그대로 놔두자인지 헷갈릴 때도 있지만.
3. 질문: 본인의 영화가 문학적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생각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메시지를 던지려 하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영화에서 던지는 메시지라는 것이 "있으나마나 한 메시지"라고도 비판했다. '사실 상업 영화일수록 메시지는 단순하고 강력하다. 예를 들면 "정의는 이긴다" 같은 것. 여기에 관객이 상상할 여지는 없다. 관객의 (상상할) 몫을 남겨두는 영화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영화는 문학적이다. 문학은 독자가 상상하면서 완성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가 그 풍경을 상상하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다. 내 영화에도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 감독님의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상업영화와 이창동 영화의 경계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상상력은 또 다른 진입로를 타고 들어온다.
4. 질문: 무거운 영화만 만드는 것 같다.
'내가 무거운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나는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새로운 영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고 싶다.'
1980년대 소설을 쓰고 1990년대 영화계로 들어온 감독님의 이력을 생각해 보면,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는 것도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도 이해가 된다. 새로운 영화도 마찬가지고. 1980년대 한국영화를 보면 새로운 영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재능과 운과 통찰력과 시대정신이 작가와 그렇지 않은 감독으로 나눠 버린다. 나는 늘 그 반대편의 감독님들을 안쓰러워했지만 어쩌면 시대와 불화했던 이창동의 길이 더 험난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5. 질문: 요즘에는 멋진 영화가 없는 것 같다.
'지금은 순수함과 진지함이 사라진 것 같다. 기술이 부족한 건 아니다. 얼마나 새로워지려고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성공모델만 따라가려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기다움"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질문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엔 젊은 감독이 잘 안 보인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청년영화가 별로라고 말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질문과 답변이 포함하고 있는 넓은 범위 안에서 현재 한국영화에 대한 비판에는 동의한다. 별로다. (아마 그게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고 CJ로 대변되는 현재의 한국영화 투자구조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학교의 천편일률적인 교육과정이 문제일 수도 있고. 하지만 영화학교의 문제라고 했을 땐 감독님 본인도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을까? 오랫동안 영화과 교수였으니.)
극장은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 테라스로 나가 커피를 마셨다. 가을바람과 커피, 그리고 방금 들었던 대담(혹은 강연)을 되새겼다. 처음 영화를 동경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때 <초록물고기>를 봤었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