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에 대한 대략적인 대중의 생각을 정리할 수는 있어도,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보통'이란 기준은 모호하고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이 '보통' 내지는 '평범'이라는 단어에 매달렸다. 자아에 대한 끝없는 고민과 갈등을 겪으며 부딪히고 깨지며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다.
나를 소설 속 인물에 빗대어 보자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속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살아온 인생의 실루엣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복에 겨운 소리일 수 있지만, 따뜻한 집안 속에서도 나는 춥고 고독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타고난 성향이 예민하고 지나치게 섬세했다.
부모님과 형제에게 가끔씩 다소 특이하다거나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받으니 외로웠다. 혼자만 다르다는 것은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면 대개는 이상하다고 치부한다. 집안에서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손녀를 어여삐 봐주시는 조부모님들 뿐이었다.
할머니께서는 내게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할머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식재료를 다듬고, 솜씨 좋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시는 모습, 뜨개질과 바느질하시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좋았다. 생각해 보면 그 곁은 언제나 따뜻하고 즐거웠고 사랑과 잔잔한 행복이 있었다.
못난 손녀였기에 그녀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가슴이 저려오면서도 죄송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낀다. 할머니를 내 곁에서 잃고 나서야 존재만으로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었는지 깨닫게 되었는데, 이따금씩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만으로 나의 일부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아서 그와의 기억을 잃지 않으려 늘 노력한다.
할머니와 다르게 아버지는 아주 어릴 적 내게 있어 다소 무서운 분이셨다. 아버지는 엄격하고 책임감이 강한 분이셨고 가정에 헌신하셨다. 평소에 집안에서는 무뚝뚝하면서도 장난스러움이 있는 모습이었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지만, 화가 나면 어린 내게 너무나도 무섭게 느껴졌다.
혼이 나야 하는 이유를 먼저 설명해 주시는 게 아니라 매를 맞고 호통을 들어야 했다. 매 맞는 게 무서워 몸이 굳었고 눈물이 먼저 났는데, 지나치게 큰 소리로 운다는 것만으로도 혼이 났다. 굳은 표정으로 윽박지르실 때면 깜짝깜짝 놀랐다.
연년생인 언니와 성향이 너무 달라 자주 다퉜는데 그 현장에 아버지가 계실 때면 혼이 날까 봐 두려웠다. 특히 나는 내게 있어 사소한 이유로 혼이 나거나 억울한 마음이 들 때, 가끔씩은 무서워도 반박을 시도했었는데 그로 인해 더 혼나서 가끔씩은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고 내 말을 들어줄 생각도 없다고 느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따뜻한 온정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고 더 엄하게 훈육을 당하며 살아와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독립하고 자신의 힘으로 사랑하는 가정을 꾸렸음에도 그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며, 상처를 주려고 한 것이 아님에도 힘들었던 유년시절 기억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엄하게 대했다고 한다.
본인도 점점 멀어지는 자식들의 모습과 원치 않게 상처를 주게 됨으로 인해 마음이 힘들고 속상해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셨다고. (이러한 사실을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훗날 이 이야기를 듣자 아버지를 미워했던 시간이 한탄스럽게 느껴졌다)
난 내성적이고 자신감이 부족한 조용한 아이였는데, 좋게 말하면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수동적인 사람이었다. 주변 환경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고 대부분 수용하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우연의 결과이든 갈등을 계기로든, 에밀 싱클레어가 프란츠 크로머로 인해 안온했던 일상이 산산조각 났듯이 나 역시 그랬다. 주변에 수많은 프란츠 크로머들이 있었다. (인간관계가 서툴며 심지가 굳건하고 단호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표적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한 번 깨진 내면의 평화는 곧 정신을 지배했다. 처음에 접한 직후 내가 거북하게 느끼고 부정했던 것들이, 곧 내가 되고 금기시되는 선을 넘어 악에 가까워 갔다. 변명하고 합리화하면서 점점 동화되어 갔다. 어쩔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 내가 그들에게 맞춰야만 곤란해지지 않고 혼자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원래 알고 있던 것이 알고 있던 게 아니게 되고 판단력과 자제력, 주의력이 박살 나다시피 했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으며 함부로 하고 업신여겼던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도덕과 윤리의식, 생활수칙을 준수하던 어린 내 모습-어쩌면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미화된 기억일지도 모르지만-은 온데간데없었다. 타락의 연속이었고 몸도 마음도 날로 피폐해져 갔다. 당연시 여기던 것들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고 학업도 매우 소홀해져 갔다. 점점 그들에게 휘둘리는 것에 익숙해지고 내가 한심하게 여기던 조직과 동화되어 갔지만 느끼지 못했고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이는 사춘기 때 정점을 찍은 뒤 학년이 달라지고 '그들'과 연락이 뜸해지며 조금씩 벗어나는 듯했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단순히 그들과 멀어진다고 해서 나 자신이 이전처럼 도덕적이며 순수한 사람이 되진 않았다. 결국 내가 선택하고 내가 한 일이라는 것, 그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았고 잊어서도 안 될 일로 여겨졌다. 나는 몇몇 타인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깊은 상처를 줬고,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아무리 반성한다고 해도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용기 내어 사과를 건넨 적도 있지만 그것이 곧 용서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 중 일부에게 용기가 부족해서, 또는 시간이 너무 흐른 뒤라서 다 전하지 못했다. 가증스럽게 들릴지라도 내 사과가 그들의 고통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다면, 상처가 조금이라도 옅어질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생각을 한들, 그저 나의 상상에 불과했다.
(정작 가족들에게는 부끄럽다는 이유로, 가슴에 대못들을 박아놓고도 제대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존감은 더욱 추락했고 자괴감을 수반했다. 나를 지옥의 불구덩이로 함께 끌고 내려간 수많은 프란츠 크로머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과정이 어찌 됐든 ‘내가’ 한 일이었기 때문에 죄책감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자기 연민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착한 아이 병이라도 걸린 건지, 드디어 제정신을 차린 건지 이로 인해 정말 많이 괴로웠다. 나는 지나치게 양심적으로 굴려고 했고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수없이 검열하고 남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래 나쁜 사람이었나, 멍청하고 순진해서 그런 걸까 의문이 들었고 선하고 당당하게, 똑 부러지고 자신 있게본인의 능력을 갈고닦으며 살아온 이들이 부러웠다. 모나지 않았지만 단단하고 동시에 유연해서 싫어할 수 없을, 많은 이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그런 사람들. 애초에 프란츠 크로머에게 휘둘리지 않을뿐더러 그의 표적이 되지 않는 사람들. 나는 왜 그렇지 못했을까 곱씹으며 스스로의 결점은 크게 생각하고 남과 나를 비교하며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많이 느꼈다.무능하고 형편없는 내가 살아야만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품었다.
(새삼, 초등학교 6학년 때 내게 친구들도 가려 사귀어야 한다고 조언했던 친구가 떠오른다. 그 친구는 똑똑하고 야무지기 때문인지 그런 이치를 진작에 깨우쳤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교우관계에 있어 그런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두루두루 잘 지내면 좋은 줄만 알았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그렇게 악한 아이는 없을 줄만 알았다. 근거 없는 믿음이자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건 머지않아 알게 됐다.
전학을 오기 전 살던 동네에서는 두루두루 어울리는 분위기였고 사는 곳이나 입고 있는 옷이 이름 있는 브랜드인지에 대한 유무는 중요치 않는 동네였다. 정말 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순박하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풍경을 지니고 있었고, 그 소수를 가려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생애 처음 사귄 단짝친구도 그곳에 있었기에 더욱 그리운 장소가 됐다. 집 전화기만 있던 시절이라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사 온 곳은 어울리는 무리를 나누고 아파트 이름을 물었으며 다들 하나같이 메이커 옷을 입고 있었다. 초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 지역의 동네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서 당황했다. 나도 곧 적응하게 되었지만 전학 온 첫날에 많이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그땐 그 친구가 단호하고 약간은 약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말은 백번 맞는 말이었다. 주변에서 그런 조언을 해준 사람이 있었을지, 그때 당시에도 정말 영리하고 현명한 아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존감이 낮아서, 욕심이 많아 현실과 이상 사이 괴리감이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열등감과 죄책감을 가슴속에 깊이 숨겨두고 이따금씩 밤마다 꺼내어 보며 쉬이 잠 못 드는 나날들이었다. 일상을 살아가야 하니 평소에는 그것들을 남들에게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회피했다. 내 본모습을 마주하고 나면 나를 떠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의 해는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내면의 상태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쉽지 않았고, 수많은 소중한 인연들을 놓친 채로 나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보통’보다 많이 멀어진 사람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평범하기보다는 특이하고 ‘같이 어울리기 좀 그런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그들’과 지내면서 나에게 그들의 안 좋은 면들이 물들면서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더욱 망가져갔다.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도 그들과 지낸 세월이 나의 발목을 잡고, 나도 모르게 원래 내 모습이었는지 그들의 모습이 물든 것인지 모를 생각과 언행이 튀어나왔다. 이런 점들 때문인지 나의 나약해진 면과 심리적 강박은 또 다른 프란츠 크로머에게 유리한 점이 됐고, 다시금 그와 접촉하고 어울리게 되어 나를 또다시 잃어버리게 되는 경험을 하게 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는 더 혼란을 겪고 망가지고 퇴화되고 가루가 되어갔다. 미련하고 어리석기 그지없고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만 같은 기분. 때늦은 자각과 현실, 자괴감, 죄책감 등은 나를 더욱 저 아래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만든 지옥에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를 우울과 무기력이 본격적으로 나를 덮칠 때, 코로나가 찾아왔다. 반수를 막 끝낸 뒤였다. 나의 반수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겨우 현실을 바라보고 정신을 차리려 했을 때, 이전의 안 좋은 습관과 좋지 못한 무리로부터 받은 매우 부정적인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나는 더욱 예민하고 민감해져서 사소한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더 많은 불안을 느끼게 됐다.
그 순간에도 지출되고 있는 고액의 학원비를 생각하니 더욱 자괴감이 들었고 좋지 못한 성적에 자존감은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이 바닥을 쳤다. 좋지 못한 형편에도 학원비를 지원해 주시는 부모님께 너무나도 죄송했다.
내가 피해를 줬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해 미안해하며 스스로에게 주는 벌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고통을 줬지만, 이것이 그들이 정말 원한 것인지도 모를뿐더러 정작 현실에 닥친 중요한 문제들은 회피하기 일쑤였고 더 잘 살아가고 성취하기 위한, 행복하기 위한 노력들은 뒷전이었다. 내게 없어선 안될 가족들마저 잊은 것 같던 나날들이었다.
나는 습관처럼 과거를 반추하고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죄책감과 자괴감, 자기혐오에서 벗어나려 해도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듯 다시 돌아오고 또 돌아왔다. 잠에 들려고 할 때면 번뇌에 싸여 근심과 불안감에 잠에 들 수 없었고, 깨어 있는 동안엔 뒤쳐지는 느낌이 두렵고 공포스러웠다.
수많은 세월 동안 나를 길러 주신 할머니, 부모님의 노력과 사랑을 배반한 내가 바로 금수 같은 자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것을 성취하고 성공시키며 번듯하게 큰, 자랑스러운 자식으로 자란 다른 또래들과 다르게 도태된 어두침침한 회색 인간. 그게 내가 생각한 나였다. 우울과 무기력으로 얼룩진 게으르고 바보같이 미련한 사람.
코로나를 겪으며 온라인 수업을 수강했고 더 이상 프란츠 크로머는 내 일상에서 매일 만날 필요가 없었다. 학기가 시작되면서 반수를 한 내가 학점까지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실패한 입시라도 내가 입학한 학교에서마저 멍청한 인간이라는 낙인을 찍을 필요는 없었다. 망가지고 갈기갈기 찢겨 바닥으로 추락한 내 인생을 다시 이어 붙일 용기를 내야만 했다.
나름의 노력을 한 결과 1년 동안 1학기, 2학기 모두 4.5만 점을 받았다. 코로나로 완화된 성적기준이 적용된 결과지만, 그래도 남들과 같은 조건에서 내가 일궈낸 첫 성취였다. 내가 진학한 학과는 디자인계열이라서 미대입시를 치르고 들어왔는데,내신점수도 낮고 학원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받아왔던 터라 누군가에겐 이런 결과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도 내겐 의미가 있었다. 그 뒤로 성적에 있어서만큼은 노력을 기울여서 2024년인 올해, 4년간 졸업요건인 130학점을 넘게 들어 총 150학점 수강, 4.3으로 졸업을 하게 됐다.
사실 성적은 내가 적어도 대학에 진학해서는 성실히 생활했다는 점을 증명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 스펙 면에서 객관적으로도 나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저 변명일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나도 모르게 앓아온 우울과 무기력을 극복해 오는 게 쉽지 않았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을 맞이할 때면 방전된 사람처럼 누워서 지냈던 것 같다.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해서 내 인생이 만개한 것은 아니다. 나보다 훨씬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그곳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은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다. 게으르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귀중한 시간을 날려 보냈다는 게 너무나도 후회된다. 남들은 같은 시간에 여행을 비롯한 다양한 경험을 하고 대외활동과 자격증 취득, 학회강연, 동아리, 공모전, 어학연수, 인턴 등을 할 뿐만 아니라 대학생으로서, 대학생이어야만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3학년이 되어서야 그나마, 방학 때마다 요리라는 취미도 시작해 보고 대학에서 동기들을 만나고 팀 활동을 하면서 조금씩 일상에 활력을 더해보려는 노력을 한 것 같다. 요리를 하며 가족들과 나눠 먹는 즐거움을 음미했고 이를 계기로 식품과학 부전공을 신청했다. 블로그를 시작하며 요리를 기록하고 조회수가 늘면서 대외활동도 한 가지 할 수 있었다.
졸업을 앞둔 지금 시점에서 여전히 후회되는 것이 한 무더기라는 점은 변치 않았다. 가족들에게 더 많이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더 소중히 대하지 않은 것, 소중한 사람들과 추억을 쌓지 않은 것, 인맥을 넓히는 데 소홀히 하고 인연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 자기 계발과 대학생활을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것, 시간을 귀중히 사용하지 않은 것, 수많은 도전과 성취를 더 하지 못한 것 등, 셀 수 없이 많다. 많은 부분에서 스스로도 속상하고 자괴감이 많이 들지만, 그 와중에도 깨달은 것들이 있다.
1. 내 생각보다 나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2. 자신의 인생을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 (나 자신을 스스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3. 용기와 노력, 도전, 성실함과 꾸준함이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것
4. ‘착함’이라는 게 무조건적인 양심과 친절함이나 베풂, 수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그러나 악행은 자신과 타인을 상처 입힌다는 것)
5. 마지막으로, 이따금씩 떠올리지만 자주 까먹는 것으로,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 내가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행운이며, 기적의 결과라는 것
그 긴 세월의 우울과 무기력이 성적 하나 잘 받았다고 극복이 된다고? 생각보다 안 힘들었던 거 아니야?
성취에 대한 경험은 그저 극복의 요소들 중 하나로 촉발되었을 뿐, 그 이후에도 우울과 무기력은 존재했다. 기쁨은 찰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는 자그마치 10년 넘게 외로움과 고통 속에 살고 있었다. 이 작은 성취는 어쩌면 그동안 이만큼의 성취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동기로 작용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난 아직 우울과 무기력을 완전히 극복한 게 아니라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단지 지금은 내가 그들보다 줄을 더 많이 끌어온 상태다. 팽팽하게 줄을 당기고 있어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기 때문에 평소에 꾸준히 마음의 근육을 키워 나가야 한다.
굳어있던 생각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성취를 통해 조금은 자신을 믿어봐도 된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할머니의 손을 이곳에서 맞잡을 수 없게 된 것이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할머니를 여의게 되면서 충격과 공허함, 상실감과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그와 동시에 가족의 소중함과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순간의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떠나시기 전 할머니께서 내게 남겨주신 선물이었다. 삶에 대한 소중함과 우리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바로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당신과 내가 함께했던 시간 모두 내게 있어 보석 같은 나날이었다는 걸, 사랑하기만 하기에도 짧은 시간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는데, 내 곁에 할머니가 안 계셔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슴이 아파온다. 철없는 손녀였던 나를 할머니께서는 항상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며 감싸주셨음을 안다. 생의 마지막까지 다정하고 온화하셨던 할머니께서 고통 없이 평안하고 행복하시길 난 언제나 기도한다.
나를 찾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면 지금 내가 속한 세계에서 깨어 나오려고 발버둥 쳐야 한다. 결국 내 안의 자아를 스스로 형성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유명한 <데미안> 속 구절,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라는 말처럼.
조각을 이어 붙이고 세공해 나가며, 인생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내 인생의 모양이 어떠할지 조금은 기대해보려 한다. 그 모습이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될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 학창 시절과 우울에 관한 이야기를 브런치에 적은 것은, 혹여나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나 지금 우울하고 무기력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삶에 대한 의지와 용기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적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친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들의 반응이 두렵기도 하고, 설령 말을 하더라도 그들 또한 그들의 삶을 살기 바쁘고 직접 경험해 본 것이 아니기에 이해와 공감을 바라긴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그래도 내가 더 낫네’라는 위안을 얻을 수도 있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사람들에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함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다짐을 해 나갈 수 있길 바라며 글을 기고한다. 함께 자기 자신에게로, 행복의 품으로 기꺼이 안길 수 있길.
한편, 현재 나는 고민 끝에 내가 수학했던 대학의 조교로 1년 간 일하기로 한 상태다. 앞으로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종류는 다양한데,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와 내가 느낀 것, 이것들과 관련해 참고하면 좋을 법한 팁 등을 이야기하고 그 속에 종종 요리와 그림을 곁들이기도 할 예정이다.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꾸려 나갈지, 조교 일을 하며 디자인 업계에 취업을 준비하는 1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후에 디자이너로서의 삶은 어떨지, 부족함이 많이 느껴지는 글일지라도 부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삶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하길 바라면서 기나긴 자기소개를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