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추억
지금도 잠시 눈 감으면 내가 좋아했던 일본의 그 작은 운치 있는 집이 떠오른다. 나는 비 오는 날이면 창밖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마당에 핀 수국을 좋아했다. 비에 젖은 수국이 수채화처럼 번져 보라색 파란색으로 주변을 물들일 듯 젖어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한껏 시를 쓰고 싶어 지기도 했다.
青、赤、緑、そして紫。
雨ににじむ紫陽花が庭を染めていく。
파랑, 빨강, 초록. 그리고 보라색.
빗물에 번지는 수국이 물들인 마당.
爪ほどの小さな蛙が跳ねて
あちこちに小さな足跡を刻む
손톱만 한 작은 개구리가 튀어올라
여기저기 발도장을 찍어댄다
窓の外へ伸ばした手のひらに
冷たい雨粒が落ち、
土の匂いがふわりと立ちのぼる
창밖으로 내민 손바닥에 차갑게 떨어지는 빗줄기. 그리고 마당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ソウル の空も、いま同じ景色なのだろうか
오늘 서울의 하늘도 같은 모습일까
ふと顔を上げると
青い光を含んだ薄暗い空が
静かに私を慰めてくれる
문득 올려다본 푸른빛 어둑한
하늘이 가만히 나를 다독여준다
아오이. 아까. 무라사키. 시로. 쿠로.
나는 일본어의 색깔 단어가 주는
그 소리가 재밌고 좋다. 두 손으로 칼을 모아 쥔 사무라이처럼 비장하게 펜을 잡고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한문이나 일본어를 멋지게 따라 써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럴 때면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른 아침 동네 할머니가 꼬부라진 허리를 하고 빗자루를 두 손에 쥐고 집 앞을 쓸다가
'오하요 네꼬짱' 하고 길고양이에게 건네는 아침인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등굣길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혼자 조용히 웃음 짓곤 했다. 그런 정서를 나는 좋아했던 것 같다.
가지런히 정리된 색색들이 음료 자판기의 음료들이 보기 좋아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백엔을 넣으면 덜커덕 소리와 함께 나온 캔음료가 좋았다. 무엇이든 가지런히 정돈된
일본의 문화가 좋아서 나는 정리정돈에 취약한 사람인데 방정리를 하고싶은 생각이 들기도했다.
전철 안에서 단어를 외우다가 꾸벅꾸벅 졸고 어느 순간 화들짝 놀라 내릴 곳을 지나친 건 아닐까 두리번거리기도 했던 어설픈 나의 유학 생활이 나는 좋았다.
일이 끝나면 일주일에 한 번 함께 살던 선배 언니가 태워주는 자전거로 밤늦게 목욕탕에
가곤 했는데 겨울이면 긴 머리카락이 젖은 채 빨래판처럼 뻣뻣이 얼기도 해서 얼마나 우스운지 깔깔거리며 비틀대는 자전거로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나중에 동네에 설치된 신기한 1인 목욕부스에 들어가 동전을 넣고 머리를 감다가 시간이 다되어 절수가 되는 바람에 거품을 달고 집으로 돌아오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주방 싱크대에 머리를 박고 감기도 했다.
가난한 나는 가끔씩 사치하듯 사 먹는, 생딸기가 사악 사악 잘려 들어간 '쇼토-케키'라고 부르는 조각 케이크를 사랑했다. 맛있는 녹차와 식후에 함께 먹는 딸기 케이크가 나에겐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그것을 먹는 날은 행복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는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이 다 있어서 김치 공장, 초밥집, 빵집 등. 일터에서 팔고 남은 음식들을 금요 기도회에 가져오면 그 밤이 너무 풍성하고 좋았다.너도 나도 어렵고 가난했던 우리의 유학시절 그땐 무엇을 먹어도 너무나도 맛있었다.
한국에는 없던 '도뎅'이라 부르던 지상 전차는 짧은 길이의 전철 같지만 길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신기하기 그지없는 교통수단이었다. 이국적인 그 전차를 타고
댕- 댕- 하는 기계음을 들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신비로운 집들과 거리풍경에 마음을 뺏기곤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탈 수만 있다면 자주 타고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자유롭고 싶었다. 시간에 돈에 공부에 아르바이트에 눌린 청춘은 한껏 자유롭고 싶었다.
나의 사랑하는 유학생활은 그 시절 살아보아야 알 수 있는 소소하고도 특별한 추억을 남겨 주었다.
*게재된 그림은 제가 직접 그린것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