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7살 가을 무렵 남편이 갑작스레 싱가포르로 주재원 발령을 받았다. 당장 3개월 뒤면 출국이었다. 영어 사교육을 시킨 거라곤 일반 유치원에서 외부 파견 선생님의 영어 수업을 일주일에 2번, 1시간씩 듣게 한 게 전부인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과연 원어민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같은 반에서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은 것도 사실이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아직 어린데 금방 영어를 습득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국제학교 입학을 앞둔 3개월간, 잠자리 영어 독서와 DVD 시청에 훨씬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예나아,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생기면 ‘My name is Elsa. Nice to meet you. What’s your name?” 하고 묻는 거야. 알겠지?” 싱가포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해준 기억이 난다. 그렇게 도착한 싱가포르였다. 입학하기로 한 영국계 국제학교에서는 아이가 영국, 미국 친구들과 한 반에서 정상적인 수업을 따라가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ESL(English Second Language,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 수업)을 매일 1시간씩 듣는 조건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다.
우리가 싱가포르에 도착한 시기는 12월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덩달아 우리도 한 달간의 방학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도 딱히 아는 곳도 없는 나라였다. 아이에게 영어책이나 읽어주자는 생각에 동네 도서관을 전전하던 중 우연히 도서관 벽보에 붙여진 ‘Winter Camp’ 전단지를 접하게 되었다.
옆 동네 미국계 국제학교에서 12월 한 달간 겨울 캠프를 오픈한다는 내용이었다. 집에 도착하여 캠프 사이트를 검색하였다. 수영, 축구, 테니스. 멀티 액티비티를 비롯하여 과학, 요리, 드라마 등 다양한 주제를 경험하는 캠프를 운영한다고 적혀있었다. 캠프는 각 주제마다 1주일 단위로 신청할 수 있었다. 아이와 상의하여 멀티 액티비티, 요리, 드라마를 각각 1주씩 총 3주의 캠프를 등록하였다. 사실 한 달간 영어 공부를 시켜볼까 하는 생각에 한국, 일본, 태국 아이들이 다닌다는 사설 학원을 알아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지금껏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영어 공부를 고작 한 달한다고 해서 과연 얼마나 실력이 늘까 싶었던 거다.
그래서 국제학교에 입학 전 한 달간 재미있고 신나게 영어로 놀게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처음 1주는 즐겁게 뛰어다니라고 멀티 액티비티를 신청했다. 다음은 선생님과 친구들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대략 감이 오는 요리 수업을 듣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으로 드라마를 택했다. 주인공은 맡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작은 단역을 맡더라도 대사 암기를 통해 영어를 문장으로 읊조리게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캠프는 해당 국제학교에 다니는 미국인 재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외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캠프 생활을 함께 했다. 아이는 캠프를 그 누구보다도 즐겁게 다녔다. 그리고 한 달 뒤 예정된 영국계 인터내셔널 스쿨에 입학하게 되었다. 3주간 영어 캠프를 다녔지만,여전히 원어민 친구들과 의사 소통은나눌 수 없는 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착각이라는 건 입학 첫날 깨닫게 되었다.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외국인 친구와 손을 잡고 교실 밖을 나서는 게 아닌가. 두 눈을 뜨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어떻게 외국인 친구를 만들었을까?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도대체 어떻게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지 다짜고짜 물었다.
그런데 아이가 예상치도 못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내가 걔한테 ‘Can I play with you?’ 하고 물어봤어.”
“그 말은 어디서 배웠어?”
“캠프에서.
애들이 그렇게 물어보면서 친구들이랑 같이 놀아.” 나는 두고두고 이 일화를 지인들에게 내 아이의 인생 첫 실전 영어라며 말한다. 싱가포르로 오는 비행기에서 내가 아이에게 알려준 영어 질문 ‘My name is Elsa. Nice to meet you. What’s your name?’은 실제 아이들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은, 그야말로 책에서 배우는 학습용 영어였던 것이다.
언어학자 스티브 크라센은 영어 학습을 잘할 수 있는 요소 중 한 가지로 ‘강한 동기부여’를 꼽았다.아이들은 또래의 친구들을 좋아한다. 특히 내 아이는 여자 아이여서 그런 지 몰라도 어릴 적부터 단짝이란 존재에 집착했다. 아이는 캠프에서 또래 친구를, 금발의 백인 여자 친구를 보며 사귀고 싶다는 강한 동기부여를 느꼈을 것이다. 처음엔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테고, 아이들이 자주 쓰는 ‘Can I play with you?’라는 문장이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계속해서 듣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발화 Output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강한 동기부여가 아이로 하여금 스스로 영어 발화를 하게 만든 것이다.
다른 일화로 아이가 여섯 살 때 푸켓 여행을 갔을 때다. 아이들을 잠시 돌봐주는 플레이 데이케어를 신청하여 아이를 맡겼다. 약속한 2시간 후 아이를 데리러 가니 얼굴에 눈물 자국이 보이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니 밖에 나가고 싶은데 영어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울음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잠을 자려는데 갑자기 아이가 “엄마, 나도 영어 잘하고 싶어. 그러면 아까 울지 않고 엄마한테 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기내에서는 대뜸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사람은 다른 나라들을 여행 다니려면 영어를 잘해야 돼." 엄마 아빠 손 붙잡고 졸졸 따라다니는 줄만 알았는데 아빠가 길을 묻고, 엄마가 시장에서 물건값을 흥정하고, 식당에서 음식 주문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나 보다.
캠프에서 또 여행에서 얻은 뜻밖의 결과였다. 내가 만약 아이를 영어 단어 하나라도 머릿속에 넣으라고 일반 사설 영어학원에 보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비단 언어뿐만 아니라 모든 학습은 ‘하고 싶다’, ‘해야 한다’라는 내적 동기부여를 가지고 임할 때 비로소 확실한 학습 효과가 나타난다.
국내에도 캠프가 있다. 하지만 한국의 캠프라 하면 방학 동안 부족한 영어 실력, 즉 리딩과 라이팅을 보충하는 일방적인 인풋 수업을 일컫는다. 하지만 국내와 해외 영어 캠프는 그 형태나 콘텐츠가 국내 완전히 다르다. 영미권의 캠프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아이들은 네모난 책상이 아닌 드넓은 교정의 수영장, 과학실, 요리실, 운동장, 연극실 등을 오가며 다채로운 경험을 만끽한다.
캠프는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가는 곳이 맞다. 하지만 영어 캠프만을 목적으로 가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이다.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가는 김에 캠프를 이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단체 패키지여행을 선택하기보다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고 원어민들과 직접 부딪혀야 하는 자유 여행을 추천한다.
예를 들어 여름휴가로 발리 여행을 떠난다면, 아이를 원데이 코스 캠프에 듣게 하는 것을 추천한다. 발리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한 캠프 활동이 많다. 보트를 타고 거북이 섬을 방문해 서식지에 대해 알아보고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 등에 배우는 에코 프렌들리 수업, 데이 코스 별 서핑 수업, 바틱 Batik을 이용한 염색 수업 등이 있다. 비용은 시간 별, 주제 별로 다른데 발리는 1~2만 원대의 저렴한 캠프들이 무척 많다.
우리 가족은 호주로 여행을 갔을 때 이틀간 숲 캠프를 체험했다. 여행을 가기 전 멜버른에서 머무르는 호텔 근처에 있는 캠프를 구글로 검색해보았다. 호주는 실내보단 실외에서 아웃도어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캠프 위주로 서치했다. 캠프는 3~5세, 5~7세, 8~16세 등 주로 나이대별로 그룹을 나눠 구성되어 있었다. 나와 남편이 멜버른 시내에서 쇼핑을 하는 동안 아이는 5~7세 아이들로 구성된 스윙, 로프 코스, 카누 등 다양한 아웃도어 액티비티에 참가했다. 하루 별로 코스를 신청할 수 있었는데, 데이 캠프를 체험하고 온 아이가 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서 다음 날은 온 가족이 캠프에 참여해 역동적인 하루를 보낸 기억이 난다. 워낙 내성적인 아이인데도 외부 활동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또래 원어민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유대 관계를 만들어가는 게 그저 신기했다. 비용은 원데이 코스로 6시간 체험에 $55 달러 정도가 들었다.
아이가 한참 중국어를 배울 때의 일이다. 본인은 중국도 싫고, 중국어도 배우기 싫은데 도대체 왜 배워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수업을 안 듣겠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당시 그즈음에 남편의 홍콩 출장이 생겼다. 출장 일정이 끝나는 날에 맞춰 우리 모녀는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박 3일간의 여행 일정 중 아이가 평소 무척이나 가고 싶어 하던 디즈니랜드를 첫 행선지로 넣었다. 아이에게 중국어로 디즈니랜드 가는 길을 물어서 찾아가면 원하는 물건을 두 가지 사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중국어 선생님께 길을 묻는 그 대화법을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렸다. 준비한 만큼 잘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아이는 스스로 길을 묻고 물어 디즈니랜드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의 경험이 중국어 실력을 키우는 데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이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중국어 수업을 거부한 적 없으며, 현재도 중국어를 공부하며HSK 시험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게다가 "중국은 이제 미국을 넘보는 강대국이니까 중국어 공부는 필수야"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다.
아이들은 경험을 토대로 성장한다. 특히 영유아기 시기에는 목표보다는 경험에 투자해야 한다. 영어 캠프나 여행의 목적은 영어 성적 향상이 아니다. 원어민과 문화를 공유하면서 자신이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닫고, 스스로 하여금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일 것이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영어 학습을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