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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rowned Being

영화 ‘거인의 죽음 (The Drowned giant)’ 에세이

8 / July / 2022


           정말 괴로워서 하는 말이든, 가볍게 하는 말이든, 누구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나도 습관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다. 특별히 힘든 것이 없더라도 정말 습관적으로. 하지만 얼마 전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사라지지 않는다’였다.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도 – 심지어는 생명이 없는 무생물들에게도 적용된다. 무생물들에게는 존재한다는 개념만 있을 뿐, 죽는다는 개념이 없기에 이 관념은 더더욱 엄격하게 적용이 된다. 가령, 계곡에서 주운 작은 돌이 있다고 하자. 이 돌을 잃어버리거나 버린다고 해서 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길가에, 숲 속에, 바닷가에, 혹은 시간이 지난 후 흙으로 -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이 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과 동식물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그리워하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내가 남기고 간 물품들, 혹은 나의 시체가 자연과 어우러졌을 때. 사람이 죽더라도 존재의 형태가 변할 뿐이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주인이 없는 길 고양이도 그를 그리워하는 동물 가족과 친구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는 그의 발자국과 흔적들이 남았을 것이다. 식물도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에도 자신이 내렸던 뿌리와 씨, 그리고 거름의 형태로 변할 뿐이지, 존재와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반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거인의 죽음>을 통해 알아보자.




           태풍이 지나간 어느 날, 해안가에 거인의 시체가 누워있다. 마을 사람들은 거인 위를 올라타고, 그림을 그리며 하나의 문화재로 여긴다. 거인에게 유일하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과학자인 스티븐뿐이다. 스티븐은 시체가 부패되고 사라지는 과정을 관찰하며, 마지막에는 마을 곳곳에서 그의 신체 일부들을 발견하게 된다. 거인은 커다란 바다 괴물 혹은 고래로 기억됐다는 스티븐의 말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이 작품은 구조화된 서사가 아닌, 인물의 관찰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스토리기에 다양한 해석들이 나온다. 거인이 사실은 고래였다는 신선한 해석들도 있다. 하지만 원작이 있는 이 작품은 거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둘 뿐이지, 거인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과 개연성, 그리고 그가 어떠한 존재인지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 마디로, 거인이 고래였든 정말 거인이었든, 이 작품에서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인간과 고래 (혹은 인간 이외에 생물)을 같은 선상에 두고 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원작자와 그의 배경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의 원작은 영국의 작가인 J.G Ballard이 1973년에 집필한 단편 소설이다. J.G Ballard는 1930년 출생자로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사업차 머물던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진주만 공격 이후에 가족과 함께 일본에 있는 민간인 포로수용소에 머물렀다. 그리고 마침내 1946년에 영국으로 송환된다. 성인이 되면서는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2년간 의학 공부를 했으며, 대학 중퇴 후 영국 공군에 입대해 캐나다로 건너갔다. 그는 영국으로 들어왔을 때를 회상하며 –



“낯선 땅에서 나의 삶을 새로이 개척해야 하는 것이 힘겨웠다.”



-고 말한다. Ballard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면서,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전쟁과 산업화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디스토피아 세계관 속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유지한다. 특히나 <거인의 죽음>을 집필한 1970년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인권 운동들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수많은 인간과 생명들이 희생되고 하나의 소유물로 여겨졌던 시대에서 그는 인간과 생명, 그리고 존재에 대한 회의감과 고민을 <거인의 죽음>에 담은 것으로 보인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자면,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살아있는 대상을 통해 ‘생명과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대신, 이미 생명을 잃은 존재를 통해 물음을 던진다. 영화 속 인물들은 거인을 그저 하나의 존재(being) 혹은 소유물로 바라볼 뿐이다. 그들은 괴생물을 봤을 때 느낄 가장 기본적인 감정인 ‘공포심’ 마저도 보여주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나마 거인에게 진심 어린 관심을 보이던 스티븐 조차도 거인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왜,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의 관찰 속에는 거인의 시체가 인간의 형태를 잃어가는 과정만이 담겨 있다. 그러면서도 스티븐은 하나의 소유물로 여겨지는 거인에게 안타까움과 동정심을 느끼며,



“The giant was still alive for me. Indeed, more alive than many of the people around me.”

(내게 그 거인은 여전히 살아 있었으니까. 사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보다 더 살아있는 듯했다.”



라는 표현을 한다. 스티븐은 자신이 거인을 그저 하나의 존재로만 보는지, 혹은 살아있는 (또는 살아있던) 생명으로 바라보는지에 대해 갈등했던 것 같다. 마을 사람들처럼 거인을 소유물로 여기진 않았어도, 하나의 흥미로운 존재로만 보고 있다는 것에서 스티븐은, 여전히 살아있을 수도 있는 거인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렇기에 더더욱 거인에게서 발길이 떨어지지도, 그의 몸을 올라타는 것을 망설였던 것이다. 거인의 머리가 제거되자 스티븐은 비로소 거인이 살아있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



“I found, almost with relief, that the head had been removed.”

(머리가 잘린 거인의 모습에 안도감 같은 게 느껴졌다.)



-라는 말과 함께 더 이상의 미련은 버린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스티븐은 마을 곳곳에서 거인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뼈를 정육점의 간판으로 쓰는가 하면, 그의 해골을 주거지로, 음경은 서커스 박물관의 전시물로, 아주 다채롭게 사용한다. 그 광경들을 바라보는 스티븐의 표정은 씁쓸하면서도 묘한 경이로움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아직 해변가에 침식된 거인의 갈비뼈를 보여주며,



“Now remember him it at all, as merely a large sea beast.”

(이제 그를 거대한 바다짐승으로 기억한다.)



고 전해준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거인은 살아있는 존재였다는 스티븐의 말, 노을에 물드는 거인의 갈비뼈, 뒤에서 잔잔히 깔리는 쓸쓸하면서도 웅장한 음악을 통해 우리는 ‘거인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느낄 수 있다. 거인이 인간의 형태를 잃고, 마을 곳곳에서 그의 흔적들을 마주하며 스티븐은 비로소 거인이 그저 하나의 ‘존재(being)’가 아닌, 존재했던(existed) ‘생명’이었음을 인지한다.






        인간의 형태를 유지했을 때의 거인은 어딘가 외롭고 슬퍼 보이는 표정을 한다. 하지만 인간의 형태가 모두 사라진 그의 갈비뼈는, 살아있는 생명의 모습으로 반짝인다. 이는 그저 하나의 ‘존재(being)’로만 여겨졌던 거인을 생명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이 이제는 생겼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보이는 스티븐의 갈등은 원작자 Ballard의 갈등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전쟁과 산업화의 시대, 그리고 수용소에서 보낸 유년기에서 그는, 무차별적으로 일어나는 폭력과 그로 인해 희생되는 무고한 생명들을 수도 없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그도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Ballard는 스티븐이 그랬듯이, 시대의 익숙함과 무고한 생명들을 향한 동정심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다. 생명에 대해 무심한 시대에서 겪는 갈등이 버거웠던 그. 이로 인해 Ballard은 자신과 바라보는 대상을 완전히 분리시키고, 철저한 관찰자의 위치를 자처했을 수도 있다. 스티븐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생각해봐야 한다. Ballard와 스티븐이 겪는 갈등과 고민들이 지금의 우리가 겪는 것과 다른가?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늘날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 시대와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몇몇의 문화권 이외에는 달랐던 적이 없다고 본다). 예전에 비해선 평화롭고 나름 생명을 존중하기 노력을 한다지만, 여전히 우리는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동식물들의 생명을 빼앗는다. 인간과 환경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만 (생태계 파괴의 주요 원인이 사실 인간이지만), 이 또한 우리가 그들을 하나의 존재(being)로만 볼뿐,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는 표시이다. 때로는 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기도 하고, 동정심을 표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 사이에서 갈등을 하면서도 죄책감으로 그들을 외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생명들이 어디에서, 왜,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 자신들은 그저 존재할 뿐인데 ‘환경 파괴범’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 그들의 황당함 등 - 그들의 존재(existence) 자체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도 알아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 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동식물 가족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생명들이 있을 것이다. 즉, 살아 있던지 죽었던지, 그 생명들로 인해 ‘영향’을 받는 대상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살아있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존재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존재하는 것.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에 의미가 생긴다는 것. 즉, 목숨의 유무를 떠나, 나로 인해 영향을 받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그 어떠한 존재(being)도 의미 없이 존재(exist) 하지 않다는 것 - 생명이 없어 보이는 무생물 조차도 존재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거인이 그랬듯, 죽어서도 우리는 살아있을 수 있고, 죽어서도 우리는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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